충렬사(부산)
부산광역시 동래구 충렬대로 347 (안락동)





충렬사는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 송상현, 부산진첨절제사 정발, 다대진첨절제사 윤흥신을 비롯해 부산지방을 지키다 순절하신 선열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605년(선조 38) 당시의 동래부사 윤훤은 동래읍성 남문 밖 농주산에 송상현의 위패를 모신 송공사를 지어 매년 제사를 지내고 기리게 하였다. 선위사 이민구의 상소로 1624년(인조 2)에 송공사는 충렬사로 사액되어 명칭이 바뀌었다. 현재의 충렬사는 1978년 정화 사업을 거쳐 사당인 본전과 의열각, 기념관, 정화기념비, 송상현공 명언비, 충렬탑 등의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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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렬사 본전 > 충렬사는 임진왜란 때 부산에서 왜적과 싸우다 순국한 선열들을 모신 사당으로, 본전은 충렬사의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입니다. 1978년 문화유산 정화사업의 하나로 신축하여 오늘날 모습에 이르렀습니다. 본전에서는 송상현 부사, 정발 장군, 윤흥신 장군을 중심으로 전사자 23위, 무명 용사 4위, 의병 62위, 총 89위의 순국선열을 모시고 있습니다. 조선이 신분 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지키다 순절하신 영령을 봉안하는 데 있어서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뜻으로 '한자리에' 그 고귀한 희생의 뜻을 기리며 모셨습니다. 더불어 송상현 부사의 시신을 수습했던 충직한 노비 철수, 매동의 위패도 있습니다. 본전에서는 동래성 전투 일인 1592년 음력 4월 15일을 양력으로 변환한 5월 25일에 매년 제향을 올립니다. 충렬사 제향은 전통적인 유교 이념을 구체화한 의식으로서, 순국하신 선열들의 신분과 관계없이 부사, 군수, 첨사, 노비를 함께 모셔둔 전국 유일한 곳입니다. 또한 충복(忠僕)과 애첩(愛妾)까지도 그 공을 기리어 제사를 지내고, 의열각에 여성이 제관으로 참여하여 제향을 모신다는 점도 충렬사의 특징이지요. 시민도 참여 가능한 시민제향 때는 국립국악원에서 악공들이 파견 나와 종묘제례악을 연주하며 더욱 실감 나는 분위기가 됩니다. 여러분들도 기회가 된다면 시민제향에 한 번 참석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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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열각 > 의열각은 임진왜란 때 순절하신 의녀 두 분과 열녀 두 분을 모신 사당입니다. 본전에 계신 분들은 당시의 신분과 관계없이 함께 모셨지만, 당시 남녀는 유별했으니 따로 모셔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여성 네 분을 따로 의열각에 모셨습니다. 열녀 두 분은 ‘애향’과 ‘한금섬’입니다. ‘애향’은 정발 장군의 양첩이었고, ‘한금섬’은 송상현 부사의 기첩으로 동래성 전투에서 일본군에 맞서 끝까지 저항하다 돌아가셨습니다. ‘이양녀’라는 송상현 부사의 또 다른 양첩은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는데, 왜장은 이양녀의 곧고 강직한 성품과 절개에 감동하여서 일본 무사 부인들의 선생으로 모셨습니다. 이후 본인의 강력한 요구로 조선으로 돌아와 사후에 송 부사와 한금섬과 나란히 묻혔다고 합니다. 자신의 소중한 신념과 가치를 지키고자 목숨까지 내던진 조선의 여성 두 분에게 존경심이 피어납니다. 동래성 전투에서 수많은 왜적이 칼과 조총을 들고 싸울 때, 조선의 백성들은 호미, 쇠스랑, 낫 등 농기구를 들고 싸웠으며 맨몸으로 돌멩이를 던지며 저항했습니다. 이때 두 분 의녀는 지붕 위에 올라가서 기왓장을 던지면서 끝까지 싸우다 일본군의 칼에 돌아가신 분입니다. 의녀 두 분은 동래성에 살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아낙네라 ‘이촌녀(二村女)’라고 기록되어있는데, 기념관에 있는 <동래부순절도(東萊府殉節圖)>에서 두 분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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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렬사 기념관 > 1978년 개관한 기념관에는 임진왜란 당시 전황을 살필 수 있는 <부산진순절도(釜山鎭殉節圖)>, <동래부순절도(東萊府殉節圖)> 등의 기록화와 옛 충렬사와 안락서원, 소줄당 현판 등이 걸려있고 선열들의 유품들도 전시, 보관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전시물인 <부산진순절도>와 <동래부순절도>는 1760년에 동래부의 화공 변박이 그린 것으로, 충렬사 기념관에서는 영인본을 소장 중입니다. 원본은 ‘육군사관학교육군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부산진순절도>는 임진왜란 첫 전투인 부산진성 전투의 상황을 한 폭의 그림에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동래부순절도> 또한 동래성에서 전투에서 송상현 부사와 병사들이 ‘전사이가도난(戰死易假道難)’의 팻말을 성 밖으로 던지고 죽음의 결전을 벌이는 장면과 이각의 비겁한 도주의 모습이 대비되어 그려져 있습니다. ‘전사이가도난’이라는 말이 생소하지요?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라는 뜻입니다. 실제 두 일은 동시에 벌어지지 않았으나, 다른 시간대를 한 폭에 그린 동도이시법(同圖異時法)이 적용돼 그려졌습니다. 그림에서 당시 선열들의 충절이 느껴지시나요? 기념관 안쪽 벽에 걸린 6점의 기록화는 부산진성 전투와 정발 장군의 모습을 그린 <부산분전순국도>, 다대진성의 전투 상황과 윤흥신 장군을 그린 <다대진성결전도>, 수영성 백성들이 의병을 조직하여 유격전을 벌이는 <수영유격전투도>입니다. 나머지 3점의 기록화는 <동래부순절도>에 따라 동래성의 전투상황과 송상현 부사의 최후를 나타내는 그림들입니다. 각각 <내성수사결의도>, <동래민중분전도>, <동래보국충정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시면, 함락되기 직전 동래성백성들이 기와를 던지며 농기구를 들고 왜적에 맞서는 장면이 있습니다. 또한 송상현 부사가 자신의 운명이 다할 것을 알고 조복(朝服)을 갑옷 위에 입고 임금님이 계시는 북쪽에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부채에 유서를 쓰고 왜적에 의해 순절하시는 내용도 담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기념관에는 송상현 부사의 친필 서적 《천곡수필》 외에도 안락서원에서 전해져오는 귀한 서적들과 장군의 제향에 제주가 입었던 갑옷과 투구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럼 천천히 기념관을 즐겨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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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줄당 > 소줄당을 이야기하기 전에 안락서원의 변천사부터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7년 후인 1605년에 동래부사 윤훤이 동래성 남문 주변의 농주산전망대에 '송공사'라는 사당을 지어 송상현 부사를 제사 지낸 것이 충렬사의 시초였습니다. 후에 1624년 <충렬사>라는 사액을 받고 정발 장군 위패도 함께 모셨지요. 1652년에 부사 윤문거는 충렬사의 위치가 저습하고 시끄러워 향사를 모시기 적절한 곳이 아니라 판단해, 안락리로 터를 잡고 규모를 확장하였습니다. 이때 순국선열들의 충절과 학행(學行)을 후세에 전하고 학업에 정진하고자 서원을 함께 건립했습니다. 안락서원의 강당으로 사용되었던 소줄당은 ‘밝을 소(昭)’, ‘높을 줄(崒)’자를 사용한 당호로 지어졌습니다. 선열들의 충절과 학행은 해와 달처럼 밝고 태산만큼이나 높다는 뜻으로 당나라 문장가인 한유의 <이제송>이라는 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소줄당의 기둥에 붙여져 있는 주련은 동래부사 권이진의 시로서 임진왜란을 겪고 난 뒤 조상님들이 겪은 혹독한 고통에 대해 비통한 심정을 나타낸 시입니다. 조선 후기 사회에서 서원은 붕당정치의 중심이 되고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는 등 여러 가지 폐단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집권 당시 전국 47개소를 제외한 나머지 서원을 철폐했었지요. 그러나 충렬사 안락서원은 임진왜란 당시 순국선열을 모신 사당이란 이유로 사액 되었고 철폐령을 피하여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까지 존속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1976년, 전국적으로 문화유적 복원사업과 정화사업이 실시되었을 때 기존의 서원은 없어지고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옛 모습의 충렬사 안락서원은 기념관 안에 모형으로 전시되어 있는데, 모형에서 옛 소줄당의 위치와 규모를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소줄당에서 글을 읽던 유생들을 한번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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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현 공 명언비> 충렬사 정문 입구에서 경내를 훑어보면, 푸른 기와를 얹은 충렬사 본전을 비롯하여 여러 채의 기와 건물과 계단이 눈에 들어옵니다. 정문 입구 왼쪽에는 의중지(義重池)라는 연못과 충렬사 관리사무소가 있고, 본전으로 올라가는 계단 근처에는 6그루의 배롱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6그루의 배롱나무가 있는 오른쪽 마당에 특별한 공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송상현 공 명언비>라는 이름의 비석입니다. 송상현 공 명언비에는 “전사이가도난(戰死易假道難)”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 의미는 “싸워서 죽기는 쉽지만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라는 내용입니다. 1592년 4월 13일, 18,700여 명의 왜군이 부산포 앞바다에 도착했습니다. 다음날 부산진성에서 왜군과 부산진첨사 정발 장군과 격돌하였으나, 정발 장군께서 전사하면서 곧 부산진성은 안타깝게도 함락되고 맙니다. 당시 부산진성의 군 · 관 · 민은 모두 합쳐 천여 명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결사 항전 끝에 전몰하고 맙니다. 부산진성을 함락한 왜군은 1진은 동래읍성으로, 또 다른 1진은 다대진성으로 향하게 되는데, 동래읍성 남문 앞에 도달한 왜군은 이런 목패를 세웠다고 합니다. “전즉전의 부전즉가아도(戰則戰矣 不戰則假我道)” “싸울 테면 싸우고, 싸우기 싫으면 길을 빌려달라.” 그때, 송상현 공이 목판에 글을 써서 적중에 던진 내용이 바로 “전사이가도난(戰死易假道難)” “싸워서 죽기는 쉽지만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였습니다. 그리고 결전을 다진 송상현 공은 객사 앞에 이르러 임금님께 북향요배로 마지막 인사를 고하고, 아버지께도 ‘유언시’로 마지막 인사를 남기게 되었지요. 고성월운(孤城月暈) 외로운 성에 달무리 졌으나 열진고침(列鎭高枕) 여러 진은 잠 속에 들었도다. 군신의중(君臣義重) 군신의 의는 무거우나 부자은경(父子恩輕) 부자의 은정은 가볍도다. 왜군이 달무리처럼 동래읍성을 에워싸고 있으나, 주변 지역 장수들이 도와주지 않는 안타까운 마음을 시를 읊으며 달래고, 아버지께 마지막 인사를 고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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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관청> 충렬사 뒷산인 망월산을 향해 약 15분 정도 오르면, 군관청 건물이 있습니다. 예로부터 살기 좋은 땅이란 마을로 형성될 만한 곳을 말하는데, 조선 시대 동래가 그런 곳이었습니다. 당시 동래부는 부산 지역의 중심이었기에 관아 건물들도 밀집되어 있었지요. 관아는 지금의 관청과 마찬가지로 공적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곳으로, 《동래부지》(1740)에 의하면 동래부에는 관아와 관련된 건축물이 50여 개나 있었다고 합니다. 읍성 안에는 행정과 군사적 목적으로 수많은 관아가 세워졌고, 이런 관아들은 수령이 집무를 하는 동헌을 중심으로 배치되는 것이 보편적입니다. 동헌은 임금의 전패를 모시고 의례를 행하는 객사와 지방 수령이 집무를 하는 곳이지요. 《동래부지》의 청사(廳舍)조에는 중군청, 장관청, 교련청, 외군관청, 별무사청 등 많은 무청(武廳)이 존재했었다는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많았던 무청들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거의 사라지게 됐습니다. 현재는 동래시장 내에 장관청과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충렬사 뒷산인 망월산 가는 길에 옮겨둔 군관청만 남겨져 있답니다. 군관청은 동래부 소속 군관들의 집무소로,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675년 동래부사 어진익이 중건하였다는 기록이 남겨져 있습니다. 원래 위치는 동래시장 부근이었으나, 주변의 도시화로 인해 1983년 충렬사 쪽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1982년 해체하여 옮겨 세울 때 건물의 마룻도리 밑에서 나온 상량문에 ‘1812년 동래부사 조정철이 증축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그 역사를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산중에 홀로서 있지만, 정면 6칸 · 측면 2칸의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건물의 모습을 보면, 그 옛날 군관청에서 업무를 보던 무인들이 떠오릅니다.
출처: 한국관광공사 오디오가이드 오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