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45





사적으로 지정된 경희궁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이궁이다. 1617년(광해군 9)부터 짓기 시작하여 1623년(광해군 15)에 완성되었다. 경희궁의 처음 명칭은 경덕궁(慶德宮)이었으나 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같은 발음이라 하여 1760년(영조 36) 경희궁으로 바뀌었다. 경희궁은 도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궐(西闕)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하여 동궐(東闕)이라고 불렀던 것과 대비되는 별칭이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탄 후 대원군이 중건하기 전까지는 동궐인 창덕궁과 창경궁이 법궁이 되었고 서궐인 이곳 경희궁이 이궁으로 사용되었다. 인조 이후 철종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임금들이 이곳 경희궁을 이궁으로 사용하였는데, 특히 영조는 치세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냈다. 경희궁에는 정전인 숭정전을 비롯하여 편전인 자정전, 침전인 융복전, 회상전 등 10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었다. 1820년대 무렵에 제작되었다고 추정하는 『서궐도안』을 보면 그 규모와 구성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경희궁에 있던 건물의 상당수를 옮겨갔으며 특히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면서 경희궁은 본격적인 수난을 맞이했다. 1910년 일본인을 위한 학교인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숭정전 등 경희궁에 남아있던 중요한 전각들이 대부분 훼손되었고 그 면적도 절반 정도로 축소되었다. 이로 인해 경희궁은 궁궐의 모습을 잃어버렸으나 지속적인 발굴조사와 연구를 통해 숭정전 일곽과 몇몇 전각들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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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관광공사 관광지 방문자추이예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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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은 광해군에 의해 건설되기 시작한 조선왕조의 궁궐입니다. 광해군은 이 당시 법궁으로 사용하던 창덕궁과 창경궁 외에 필요할 때 이어할 수 있는 이궁을 짓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인왕산 아래 사직단 뒤편에 인경궁과 새문동 정원군 집터에 경덕궁을 건설하였지요. 이후 인경궁은 인조에 의해 헐려 창덕궁과 창경궁을 수리하는데 사용되었고, 경덕궁만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난 광해군은 비록 궁에 들지 못하였지만, 인조 시기 이괄의 난과 두 차례의 호란으로 창덕궁과 창경궁이 모두 불타 버리면서 이후 왕들이 이곳에 많이 머물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지금의 이름인 경희궁이 아닌 경덕궁일까요? 경희궁이라는 이름은 영조 시기에 개칭된 것입니다. 영조는 경덕궁이 원종의 시호인 경덕과 음이 같음을 문제 삼아 경희궁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지요. 경희궁은 정문인 흥화문을 비롯하여 동문인 흥원문, 북문인 무덕문, 서문인 숭의문, 남문인 개양문 등 다섯 개의 문을 두었습니다. 또 정전인 숭정전과 편전인 자정전, 침전인 융복전, 회상전 등 10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지요. 1820년대 경희궁 전경을 그린 ‘서궐도안’을 보면 당시 120여 채가 넘는 경희궁의 규모를 알 수 있습니다. 경희궁은 건물의 배치가 정궁인 경복궁과 다른 양상을 띄고 있습니다. 앞뒤로 외전과 내전이 나란히 놓여있는 경복궁과는 달리 외전과 내전이 좌우에 놓여있어요. 그리고 궁의 정문이 오른쪽 모서리에 있는 점도 특이한데요. 아마도 격식을 벗어난 경희궁의 전각 배치는 형식의 얽매임이 덜한 이궁이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경희궁은 1910년 조선총독부의 소유가 되면서 궁궐의 지위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경희궁 내의 전각들은 이후 경성중학교 교원 양성소, 일본계 사찰 조계사의 본당, 강의실, 호텔 정문 등 궁궐과는 전혀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지요. 현재는 서울시의 경희궁 복원 사업으로 인해 원래 자리로 되돌아왔지만 완전한 제자리를 찾지는 못했답니다.
출처: 한국관광공사 오디오가이드 오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