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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창경궁(昌慶宮)은 성종이 세 명의 대비를 위해 옛 수강궁에 창건한 궁이다. 창경궁은 원래 1418년(세종 즉위) 세종이 상왕 태종을 위해 창건한 수강궁(壽康宮)이 있던 자리이다. 이후 1483년(성종 14) 성종이 세 명의 대비인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 덕종의 왕비 소혜왕후, 예종의 왕비 안순왕후를 위해 수강궁을 크게 확장하고 궁의 이름을 창경궁이라 하였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경계 없이 동궐(東闕)이라는 하나의 궁궐 영역이었으며, 주로 왕실 가족들의 생활공간으로 사용하였다. 창경궁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616년(광해군 8) 중건하였으며, 1830년(순조 30) 대화재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소실되었다가 4년 뒤에 중건하였다. 그러나 1907년 순종이 황위에 오른 후 창경궁 내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조성하면서 궁궐로서의 모습을 잃기 시작하였다. 1911년에는 일제에 의해 궁의 이름마저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되어 궁궐이 아닌 공원화가 되어 훼손이 심하였다. 광복 후 1983년에 다시 창경궁으로 명칭을 회복한 후 궁궐 경내에 있던 동물원을 이전하고 본래 궁궐의 모습으로 복원공사가 진행되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창경궁은 남향으로 있는 다른 궁궐과 달리 정문과 정전이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용 정보

이용시간09:00~21:00 (입장마감 20:00)
휴무일매주 월요일 ※ 단, 정기휴일이 공휴일 및 대체공휴일과 겹칠 경우에는 개방하며, 그 다음의 첫 번째 비공휴일이 정기휴일임
주차가능 (22대)
문의02-762-4868

혼잡도 예측

앞으로 일주일간 방문객이 몰릴 것으로 예상되는 정도입니다. 실제 인원이 아니라 상대적인 수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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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관광공사 관광지 방문자추이예측

오디오 해설

현장에서 들을 수 있는 해설 음원입니다. 대본도 함께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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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조 500년의 핵심 고궁, 창덕궁 창덕궁은 조선 3대 왕 태종 이방원에 의해 이궁으로 지어진 궁궐입니다. 으뜸인 경복궁이 전염병이나 화재, 또는 다른 응급 사태를 당했을 때 예비로 쓰기 위한 궁궐이었죠. 하지만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이 있는데요, 창덕궁은 경복궁이 지어진 지 얼마 안 된 10년 후에 지어집니다. 정궁인 경복궁이 있는데 부족함이 있었을까요? 정도전: 짐작은 했습니다만 결국 이렇게 끝나는군요… 세자 저하가 죽게 되는 겁니까? 하늘이 원망스럽습니다. 태종: 숙부님이 자초한 일입니다. 눈을 감으시지요. 조용히 보내드리겠습니다. 조선을 건국하는데 수많은 공을 세운 정도전과 태종은 사병 혁파 사건으로 부딪치게 됩니다. ‘사병혁파’ 란 종친들과 귀족들이 소유하고 있던 사병을 국가 중앙군에 소속시키는 걸 의미하는 데요, 태종은 안그래도 정도전으로부터 지속적인 견제를 받았는데 왕실 권력의 기반인 사병 마저 없애려고하자 위기감을 느낀 겁니다. 태종의 힘은 막강한 사병에서 나왔는데요, 정도전 뜻대로 사병을 없애면 힘이 약해질 테니 결단을 내려야 했죠. 때를 기다리던 태종은 1398년 8월 25일 사병을 동원해서 정적 정도전을 제거하게 되는데요, 이때 이복형제들도 함께 살해합니다. 이를 일컬어 1차 ‘왕자의 난’이라 부르게 되죠. 이후 다시 한 번 형제와의 싸움에서 무력으로 승리한 태종은 주도권을 잡고 왕위를 물려받게 됩니다. 그런데 왕이 되고 보니 태종은 경복궁이 께름칙했을 겁니다. 형제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간 현장이 경복궁이었거든요. 자기가 직접 죽인 형제들의 원혼이 떠돈다고 느꼈을지도 모르죠. 이러한 역사적 배경들도, 태종이 창덕궁을 짓게 된 이유들 중 하나로 추측됩니다. 태종 때부터 줄곧 이궁 역할을 하던 창덕궁은 임진왜란 이후로도 약 270년간 경복궁을 대체해 실질적인 중심 궁궐 역할을 합니다. 이번에는 비용이 문제였는데요,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경복궁을 중건하려고 보니 돈이 어마어마하게 드는 겁니다. 당시는 전쟁으로 인해 나라 살림이 아주 어려워진 때였거든요. 그래서 비교적 공사비가 낮은 창덕궁이 경복궁보다 먼저 지어지게 되죠. 그래서 경복궁이 중건되기까지 270년 동안 창덕궁은 조선의 ‘으뜸 궁’ 역할을 하게 됩니다. 조선왕조가 500년이니까 무려 반 이상인 셈이죠. 덕분에 오랜 시간 왕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온 궁중 건축물들이 현재까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부터 왕들이 남긴 발자취를 하나하나 따라가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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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화문, 홀로 동쪽을 바라보다 처음 보시는 곳은 창경궁의 정문! 바로 홍화문입니다. 수강궁에서 창경궁으로 확장할 때 처음 지어졌고요, 보시다시피 문이 동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보통 궁궐의 전각들은 남쪽을 향합니다만. 홍화문은 왜 동쪽일까요? 동쪽이 좋아서? 아닙니다. 우리 민족은 풍수지리적으로 남향을 가장 선호해온 만큼 홍화문 역시 남쪽으로 문을 내고 싶었습니다. 게다가 다른 궁궐은 다 남쪽으로 정문인데 여기만 동쪽이면 이상했거든요. 홍화문만 동쪽을 향하고 있는 이유는 본래의 창경궁과 종묘가 담장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종묘는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던 왕실의 사당으로서 국가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장소였는데요, 담장으로 두 건축물을 이어 국가건축물로서의 중요성과 상징적 의미를 연결하고자 했던 겁니다. 부관: 창경궁을 한번 보십시오. 우리 대일본제국이 조선을 갖기 위해서는, 창경궁과 종묘를 연결하는 맥을 끊으셔야 합니다. 총독: 그럼 뭘 어떻게 하면 좋겠소? 부관: 그 둘 사이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만들겠습니다! 그러면 조선은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총독부는 참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 민족정신을 말살하려 했는데요, 그 중 하나가 창경궁과 종묘를 잇던 담장을 허물고 도로를 내어 두 건축물을 단절 시켜버린 일입니다. 지금의 ‘율곡로’를 창경궁과 종묘 사이에 만든 건데요, 북한산에서부터 내려오는 주맥을 끊고 한 국가의 역사와 상징적 정신이 담긴 궁궐의 의미를 퇴색시키고자 했던 겁니다. 그렇게 훼손된 우리 국가유산은 공사 예산규모만 1000억원, 12년 간의 복원기간을 거쳐 다시 연결되는데요, 지난 2022년 7월 22일 창경궁과 종묘를 잇는 ‘궁궐담장길’ 이라는 이름으로 시민들에게 개방됩니다. 일제가 갈라놓았던 길이 90년 만에 다시 이어진 셈이죠. 지금은 고즈넉하게만 보이는 돌담길이지만 당시 나라를 잃고 비통해 했을 우리 선조들의 애환을 잠시나마 느껴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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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움과 비극이 공존하는 옥천교 동서양을 막론하고 물길을 건넌다는 건 성스러운 세계로의 진입을 의미하는데요, 외부세계와 창경궁을 잇는 다리 ‘옥천교’ 입니다. ‘옥구슬처럼 맑은 물이 흐른다’는 뜻의 옥천교는 다리 아래 물길을 통해 궁궐의 명당기운이 외부세계로 빠져나가는 걸 막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지금은 비록 많은 물이 흐르고 있진 않지만 과거 궁궐을 가로지르며 고즈넉한 운치까지 더했을 옥천교 물길의 모습이 상상되시나요? 고개를 들어 다리 너머 회화나무를 보시겠어요? 한 폭의 산수화에 나올 정도로 아름답게 뻗어 있는 나무죠? 1700년대부터 이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창경궁의 회화나무는 세월의 흐름만큼이나 다양한 조선 궁궐의 역사를 함께 해 왔는데요, 유독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설화가 전해집니다. 1735년 정월, 영조는 42세에 늦둥이 사도세자를 낳았습니다. 귀하게 얻은 자식이 총명하기까지 했으니, 장차 나라를 이끌 인물로서 큰 기대를 걸었죠. 영조는 얼마나 기뻤는지 아들이 생후 13개월 되던 때, 세자로 책봉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아직 어린 아들을 상대로 무리한 교육을 시행했고 사도세자는 학습에 대한 부담감과 심리적인 스트레스 때문인지 정신병을 얻게 됩니다. 의대증 이라고 들어보셨나요? 말 그대로 옷 입기를 어려워하는 일종의 강박증 인데요, 사도세자가 앓았던 정신병으로도 유명합니다. 사도세자는 옷 한 벌을 입기 위해 수십 벌의 옷을 늘어놓아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거나 귀신에게 기원한다며 옷에 불을 지르는 일, 옷을 입힐 때 살에 옷이 닿았다며 궁녀를 칼로 베어 죽이는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사도세자로 인해 죽어 나가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 그 수는100여 명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게, 더는 지켜볼 수 없었던 아버지 영조는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명하게 되죠. 영조: 내 이미 결정을 내렸다. 긴말 하지 말자. 자결하라. 하지만 끝내 자결을 거부하자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둡니다. 영조: 뒤주... 뒤주를 가져와라!! 뒤주에 갇혀 한 여름의 더위와 허기를 감당해야했던 사도세자는 8일 후,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는데요, 역사는 이 사건을 일컬어 ‘임오화변’ 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뒤주에 갇혀 울부짖던 사도세자의 통곡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저 옥천교 너머의 회화나무도 이를 보며 함께 괴로워하다 뿌리와 줄기가 뒤틀려버린 건 아닐까요? 참 비극적인 사연… 그 역사의 현장으로 조금 더 들어가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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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정전, 그대들은 함부로 경거망동 하지말라! 명정전은 창경궁의 중심이 되는 건축물입니다. 조선시대 5대 궁궐의 정전 중 가장 오래된 전각이자, 국보 제226호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죠. 다른 궁의 정전에 비해 규모가 크지 않아 큰 국가행사 보다는 작은 업무나 왕실의 잔치를 벌였다고 하는데요, 정전의 크기에 비해 넓게 펼쳐 있는 마당이 눈에 띕니다. 어딘가 낯익진 않으신가요? 맞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많이 보던 그곳이죠! 넓게 보이는 마당은 신하들이 왕을 맞이하던 공간이자 공식적인 국가행사공간이기도 한 ‘조정’입니다. 이곳에 모인 신하들을 가리켜 조정대신이라 불렀죠. 바닥을 자세히 볼까요? 어째 돌이 울퉁불퉁 매끈하지가 않고 걷기 불편하지 않으신가요? ‘박석’이라 부르는 돌입니다. 왕과 조정대신이 오가는 궁궐에 왜 이런 돌들을 깔았을까요? 다 이유가 있었는데요, 왕을 모시는 신하들을 향해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말고 한걸음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조심스런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비록 지금 우리 앞에 왕이 계시진 않지만 여러분들도 차분함을 잃지 않으려던 대신들의 마음으로 천천히 궁궐을 살펴보시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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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통을 품은 문정전 문정전은 왕의 집무실로 쓰였던 편전입니다. 왕은 주로 이곳에서 업무를 보고 신하들과 회의를 했죠. 이번 건축물에선 외관 보단 안쪽을 좀 더 유심히 살펴보시겠어요?고개를 들어 천장의 단청을 보시면 어딘가…새 건물 같다 라는 느낌을 받으실텐데요. 우리의 많은 국가문화재가 그러했듯 일제강점기에 이 전각 역시 훼철되게 됩니다. ‘헐어서 치워버렸다’ 라는 뜻인데요, 이후 광복과 한국전쟁을 지나 어느정도 국가적 기틀이 자리 잡힌 1986년이 되어서야 복원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정전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2006년 4월 26일 국가의 토지보상에 불만을 품은 한 노인이 문정전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다행히도 당시 곁을 지나던 행인과 관리자들의 빠른 대처로 1시간여 만에 진화되었지만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잃어버릴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난 그 노인이 이번에는 대한민국 국보1호 숭례문에 방화를 저지르는 만행을 벌이게 됩니다… 국보 1호 숭례문이 처참하게 불 타는 모습을 전 국민이 지켜봐야 했던 그 당시의 상황은 지금 다시 떠올려봐도 참혹한 장면들인데요, 국가유산이란 영속적인 게 아니라 우리가 늘 관심 갖고 지켜야하는 ‘정신’과도 같은 것이며 우리 후손들에게까지 온전히 물려줘야 할 ‘민족의 유산’이라는 걸 깨닫게 해주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일제침략으로 인한 고궁의 훼철과 자국민의 방화로 인해 훼손까지… 순탄치 않은 시간의 역사를 지나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금 복원된 문정전은 또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기도 합니다. 옥천교를 지날 때 언급했던 ‘비운의 왕세자’ 이야기 기억나시나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곳, 바로 이곳 문정전 앞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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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치의 기본, 열띤 경연이 이뤄지는 숭문당 이곳은 학문을 숭상하는 집, 숭문당입니다. 왕이 스스로 학문을 갈고닦고 연주하던 곳, 즉 ‘경연’을 하던 곳이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왕이 신하와 함께 열띤 경연을 하던 모습, 한번쯤은 보셨을 텐데요. 조선시대의 왕은 통치를 잘 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경연수는 왕마다 달랐다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성종은 1469년부터 1494년까지 25년의 재위기간 동안 무려 9006회의 경연을 했다고 합니다. 일수로 계산해보면 24년이 넘는 기간으로 재임기간 내내 거의 하루도 빼먹지 않은 횟수입니다. 우리가 흔히 상상하던 ‘왕’의 여유로운 모습과는 많이 달랐겠죠? 그렇다면 성종은 왜 이렇게 경연을 많이 했을까요? 단서는, 왕이 된 과정에 있었습니다. 성종은 앞선 왕들과는 달리 왕이 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거든요. 1457년, 아버지인 의경세자가 20세 라는 나이에 갑자기 죽게 되자 성종은 궁 밖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에 이어 왕위에 오른 삼촌 예종마저 14개월 만에 일찍 죽게 되자 그 자리를 성종이 잇게 됩니다. 그의 나이 겨우 13세였죠. 당시의 성종은 스스로도 아직 왕이 되기 위한 소양이 부족하다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를 극복하고자 끊임없는 공부를 택한 거죠. 꾸준히 국정운영에 있어 소양을 쌓으며 성장한 성종은 당시 정치세력을 독점하던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새로운 정치세력으로의 사림파를 핵심 관료에 등용하는 등 왕으로서의 진정한 면모를 갖추게 되고 오늘날 역사로서 전해지는 다양한 정치 지혜를 발휘합니다. 이런 꾸준한 힘들이 어디서 생겼을까요? 아마도 물려받은 왕위에 안주하지 않고 밤낮으로 스스로를 갈고 닦던 왕의 공부, 즉 ‘경연’의 힘이었을 것 같습니다. 열띤 경연을 하며 궁궐 안을 울렸을 성종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으신가요?

출처: 한국관광공사 오디오가이드 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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