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감은사지
경상북도 경주시 문무대왕면 용당리





감은사는 동해안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신라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후 부처의 힘을 빌어 왜구의 침입을 막고자 세운 절이다. 절이 다 지어지기 전 문무왕이 죽자, 그 뜻을 이어받아 아들 신문왕이 682년 완성했다. 문무왕은 죽기 전 내가 죽으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하니 화장하여 동해에 장사를 지낼 것을 유언했다. 문무왕을 장사한 곳이 대왕암이며, 신문왕이 이곳 사찰을 완성하고 부왕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의미로 이름을 감은사라 지었다고 한다. 지금은 3층 석탑 2기와 금당 및 강당 등 건물터만 남아있으며, 황룡사, 사천왕사와 함께 나라를 보호하는 호국사찰로 언제 절이 무너졌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현재의 모습인 경주 감은사지는 1979년부터 2년에 걸쳐 전면 발굴조사를 실시해 얻은 자료를 통해 창건 당시의 건물 기초대로 노출 정비한 것이다. 아울러 금당의 지하에는 동해 바닷물이 유입되는 통로를 만들어 바다용이 된 문무대왕의 이 통로를 통해 들어와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상징적인 공간을 만들었다는 흔적도 있다. 또한 감은사터의 상징인 우뚝 솟은 두 3층 석탑은 통일신라 초기의 탑으로 수십 개의 부분을 조립해 세웠다. 이 탑들은 우리나라 석탑 가운데 가장 큰 것이다.
이용 정보
오디오 해설
현장에서 들을 수 있는 해설 음원입니다. 대본도 함께 확인하세요.
- NaN:NaN
해설 대본 보기
감은사지 석탑 감은사지에 도착하셨나요? 앞쪽에 서 있는 탑 두 개가 보일 거예요. 동서 방향으로 서 있는 두 탑이, 국보로 지정된 감은사지 3층 석탑이에요. 삼국통일시기에 만들어진 이 석탑은 신라의 소박함과 씩씩한 기상을 매우 세련되게 표현했답니다. 석탑이 굉장히 커 보이죠? 탑 꼭대기의 쇠로 된 기둥을 찰주라고 부르는데, 이곳까지의 높이를 합하면 탑의 높이가 약 13미터나 된다고 해요. 이렇게 탑을 크게 만들어 위엄 있게 보이도록 한 것은, 부처님의 힘으로 왜적을 막고자 한 호국사상이 탑에 깃들어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럼 이제, 탑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해요. 감은사지 석탑은 다른 석탑과는 다르게, 각 부분들이 하나의 돌로 된 것이 아니라, 다듬어진 많은 돌들이 꼭 들어맞게 조립되어 있어요. 그리고 서쪽 탑과 동쪽 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청동제 사리함과 수정으로 된 사리병 등 귀중한 유물들이 나왔죠. 청동제 사리함은 섬세한 조각이 돋보이며, 수정 사리병의 금 알갱이로 장식된 뚜껑과 받침 등은 정교한 통일신라의 공예기술을 엿볼 수 있답니다. 현재 유물들은 보물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어요. 그럼 이제, 감은사 금당이 있던 자리로 가볼까요? 금당 터는 두 탑 사이로 보이는 곳이에요.
- NaN:NaN
해설 대본 보기
이 가이드는 정경미님의 목소리로 녹음 되었습니다. 경북 경주 양북면 용당리에 위치한 감은사.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의 절 이름인데요.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곳은 통일신라시대 신문왕이 부왕인 문무왕의 뜻을 기리고 그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곳이라고 합니다. 당시, 삼국이 통일되고 당나라 세력까지 물리친 상황이었지만 왜구가 수시로 쳐들어와 나라를 어지럽혔는데요. 문무왕은 불력으로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진국사, 즉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의 절을 세우려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절이 완공되기 전에 병이 깊어진 문무왕. 그는 승려인 지의법사에게 자신이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으로 나라를 지킬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는데요. 문무왕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의 뜻을 받들어 절을 완공하고 감은사라 이름 붙였습니다. 특히 대웅전과 유사한 개념인 금당 아래쪽에 용혈을 파서, 용으로 변한 문무왕이 해류를 타고 사찰 경내를 출입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죠. 감은사는 황룡사, 사천왕사 등과 함께 호국 사찰로 명맥을 이어오다가 폐사된 이후 지금은 절터만 남아있는 상황인데요. 현재 이곳에서는 국보인 삼층석탑 2기와 금당 및 강당 등의 건물 터를 볼 수 있습니다.
출처: 한국관광공사 오디오가이드 오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