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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희문

서울 중구 광희동2가

광희문은 1396년(태조 5년) 도성 창건 때 동남쪽에 세운 소문이다. 광희문은 실질적인 도성의 남소문으로 이를 흔히 수구문으로 불렀다. 청계천이 흘러 나가는 곳에 세워진 수구가 거리상으로는 광희문보다는 동대문이 가깝지만, 남소문이 장충단공원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언덕에 따로 있었기 때문에 편의상 수구문이라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수구문은 실제로는 시구문으로 이용되었으니, 서쪽의 서소문과 함께 도성 내의 장례행렬이 동쪽 방향으로 지날 때 통과하는 문이었다. 임진왜란으로 도성과 궁성이 파괴될 때 광희문도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광희문은 일제가 전차궤도를 부설하면서 성곽을 철거할 때도 문과 문루는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6·25 전쟁으로 문루가 파고 된 상태로 방치되었다. 그 후 1975년에 도로 중간에 위치하게 되어 원위치에서 남쪽으로 15m 옮기는 이전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1975년 11월에 준공되었다.

이용 정보

이용시간상시 개방
휴무일연중무휴
주차불가능
유모차 대여없음
문의서울 중구청 건축과 02-3396-5843

혼잡도 예측

앞으로 일주일간 방문객이 몰릴 것으로 예상되는 정도입니다. 실제 인원이 아니라 상대적인 수준입니다.

  • 토혼잡
  • 일혼잡
  • 월여유
  • 화여유
  • 수보통
  • 목여유
  • 금혼잡

출처: 한국관광공사 관광지 방문자추이예측

오디오 해설

현장에서 들을 수 있는 해설 음원입니다. 대본도 함께 확인하세요.

  • 광희문

    2:24
    해설 대본 보기

    광희문 1880년대 후반 한양도성 내에 콜레라가 창궐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감염되어 하루에도 수백 명이 죽어 나갔습니다. 그야말로 생지옥이었지요. 이화학당을 세운 선교사 스크랜턴이 어느 날 광희문으로 갔다가 수많은 아이들이 광희문 밖에 버려진 것을 보았습니다. 스크랜턴이 조선인 안내원에게 물었습니다. “아이들이 성문 밖에 버려진 까닭이 무엇입니까?” 안내원이 대답했습니다. “이 아이들은 콜레라에 감염되었습니다. 죽음이 가까워 성 밖으로 옮겨놓은 것입니다.” 스크랜턴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죽어가는 아이들을 집에서 치료해야지 왜 성 밖으로 몰아냅니까?”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가로젓던 스크랜턴은 결국 한 아이를 데려와 치료하고, 이화학당에 다니게 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도성 안에 무덤을 조성할 수 없었습니다. 성안에서 생을 마감한 이는 무조건 성을 나가야 했습니다. 이 때 시신은 소의문과 광희문으로만 나갈 수 있었습니다. 광희문을 시구문이라 부른 것도 이 때문입니다. 광희문에는 애틋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시구문 돌가루가 만병통치약으로 불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방 사람들이 한양에 간다고 하면 “시구문 돌가루를 긁어 오라”는 말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는 세상 어떤 병이라도 시구문이 겪는 고난을 이기지 못하리라는 미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1907년에도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일제가 조선 군대를 강제로 해산했으나, 이에 불복한 조선군과 결국 시가전을 벌였습니다. 조선군의 패배로 전투가 막을 내리자 일제는 조선군시신 120여 구를 광희문 밖에 늘어놓고 가족에게 찾아가라고 했는데, 며칠간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광명의 문’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우여곡절이 담긴 서글픈 문입니다.

출처: 한국관광공사 오디오가이드 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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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한국관광공사 TourAPI · 공공누리 제1유형(출처표시)를 활용합니다. · 최종 확인일 2026-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