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골공원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99 (종로2가)





조선시대 원각사터에 세운 서울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다. 조선 세조 13년에 원각사로 건립하였던 것을 고종 34년인 1897년 도지부 고문인 영국인 브라운에 의해 공원으로 조성되어 1920년에 공원으로 개원하였다. 1919년 3·1 운동 당시 처음으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친 3·1 운동의 출발지로서, 우리 민족의 독립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유서 깊은 곳이다. 1992년 5월 28일 공원 명칭을 파고다 공원에서 탑골공원으로 개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공원 내에는 독립운동 봉화에 불을 댕겼던 팔각정을 중심으로 국보 원각사지 10층 석탑, 보물 원각사비 등의 문화재와 3·1 운동 기념탑, 3·1 운동 벽화,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 한용운 선생 기념비 등이 있다.
이용 정보
혼잡도 예측
앞으로 일주일간 방문객이 몰릴 것으로 예상되는 정도입니다. 실제 인원이 아니라 상대적인 수준입니다.
- 토혼잡
- 일혼잡
- 월여유
- 화여유
- 수보통
- 목여유
- 금혼잡
출처: 한국관광공사 관광지 방문자추이예측
오디오 해설
현장에서 들을 수 있는 해설 음원입니다. 대본도 함께 확인하세요.
3.1 독립 운동의 발상지
4:56해설 대본 보기
3.1 독립운동의 발상지 이곳은 탑골공원입니다. 탑골공원 정문에 들어서기 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삼일문’ 이라 적힌 한글 현판입니다. 왜 탑골공원의 정문 이름을 삼일문이라고 지었을까요? 그 이유는 탑골공원이 독립운동 중 가장 큰 3.1 독립운동이 시작된 곳이기 때문이죠. 일제강점기 1919년에 민족대표 33인은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려다 장소를 바꿔 인사동에 위치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습니다. 그러나 학생대표 정재용이 탑골공원 팔각정에 마련된 단상에 올라서서, 군중들 앞에서도 독립선언문을 낭독했습니다. 탑골공원에서 시작한 ‘대한 독립만세’라는 군중들의 함성소리는 크게 울려 퍼졌고, 3.1 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팔각정을 중심으로 3.1운동 당시의 모습을 기록한 기념 부조와 찬양비, 독립선언서 내용이 적혀 있는 독립선언 기념탑과 3.1운동을 이끈 민족대표 33인의 지도자라 할 수 있는 독립투사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 등이 이곳 탑골공원이 3.1운동의 발상지였음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한적한 도시공원으로만 생각했던 탑골공원이 3.1 운동의 발상지라니, 새삼 탑골공원이 새롭지 보이지 않나요? 그런데 탑골공원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요? 서울 최초 도시 공원 탑골공원에는 3.1 운동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역사도 함께 숨 쉬고 있습니다. 원래 탑골공원 자리에는 고려시대 흥복사가 있었고, 조선 초기에는 흥복사 터에 원각사라는 절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 흔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 바로 팔각정 오른쪽에 위치한 대원각사비입니다. 원각사비는 원각사를 창건한 경위가 적혀져 있는 비석인데, 불교 신자였던 세조임금은 양주 회암사에서 나누어 온 사리를 기념하기 위해서, 흥복사 터에 원각사를 짓고, 13층 석탑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다음 왕인 성종이 원각사의 창건 이야기를 대원각사비에 새겨 넣은 것이랍니다. 대원각사비는 거북이 모양의 거대한 받침돌을 만들고 그 등 위에 연잎을 새겨 비석을 세울 자리를 만들어, 비석 위에는 마치 살아있는 듯한 쌍룡 조각을 볼 수 있어요. 그리고 팔각정 뒤편에 위치한 국보 원각사지십층석탑 역시 원각사 시절에 세워진 석탑입니다. 과거에는 석탑 주변을 탑동 혹은 탑골 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지금의 탑골공원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습니다. 석탑은 조선시대 석탑으로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우수한 조각솜씨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석탑의 아래에는 삼장법사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일행을 이끌고 인도에서 불법을 구해오는 과정이 새겨져 있고, 윗부분에는 부처님의 일생과 일화를 조각해 놓았습니다. 하지만 대리석으로 만들어 화려하고 세밀하게 조각할 수 있었던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손상되기도 쉬워 현재는 유리 보호벽을 설치하여 석탑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화려한 유산을 가지고 있던 원각사는 연산군 때 무너지고, 탑골공원 터는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되었습니다. 그러다 1897년 고종황제가 영국인 브라운의 건의를 받아들여, 공원으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탑골공원은 제사를 지내는 재실이나 음악연주회장으로 사용되다가 1920년에 서울 최초의 근대식 공원으로 변모해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었습니다.
탑골공원
3:50해설 대본 보기
"7코스 혁명의 길 종로에서 만나는 새로운 세상을 위한 움직임, 혁명의 길 이야기 (안내) 방송인 정재환 (배역) 박승필(영화제작자, 광무대/단성사 대표) 아차, 그런데 7코스의 첫 장소가 지금 여러분이 계신 탑골공원입니다. 보통 종로모던길은 각 코스의 끝나는 지점과 시작하는 지점이 다르지만, 6코스와 7코스는 같습니다. 그만큼 탑골공원이 여러 의미를 가진 곳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난 코스에서 탑골공원에서 일어난 3.1운동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살펴보셨을 겁니다. 황제가 하사한 공간에서 자주와 독립을 외치며 시민으로 나아간 공간이 바로 여기였다는 사실 말입니다. 아마 이곳에서 만세운동을 벌인 사람들이 곧바로 제국에서 공화정으로, 백성에서 시민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러나 운동의 힘이라고 할까요, 역사의 뜨거운 현장에서, 뜻을 함께하는 사람과 고민하고 또 움직이면서 새삼스럽게 깨닫는 것들이 있었을 겁니다. 3.1운동 당시 탑골공원은 혁명의 분위기로 가득 찼을 겁니다. 그리고 탑골공원은 또 다른 혁명의 현장이었습니다. 1960년, 독재를 무너뜨리기 위해 일어났던 4.19혁명의 불길이 타올랐습니다. 이곳에 이승만 대통령 동상이 있었는데요,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발표하던 날, 탑골공원에 있던 대통령의 동상도 시민들에 의해 끌려 내려왔던 것입니다. 이처럼 탑골공원은 혁명과 깊은 인연을 가진 공간입니다. 지금 탑골공원에는 3.1운동을 이끌었던 손병희 선생의 동상과 팔각정, 그리고 여러 지역에서 일어난 3.1운동을 기념하는 부조, 탑골공원의 이름이 유래한 원각사지 석탑, 원각사비가 있으니까요, 귀한 유물과 문화재를 감상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살펴보셔도 좋을 것입니다. 아, 제가 공연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어서 이 이야기도 꼭 하고 싶습니다. 대한제국 시기, 탑골공원은 공연장이었습니다. 대한제국 국가를 작곡했던 독일 사람, 프란츠 에케르트는 군악대를 지휘하기도 했습니다. 그 에케르트가 여기 탑골공원에서 군악대의 정기 공연을 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드물게 서양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곳이었으니 꽤 인기가 있었습니다. 탑골공원이 또 다른 모습으로 빛을 발하던 순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 많은 사람의 함성으로 뜨거웠던 1919년 3월, 그리고 1960년 4월의 모습을 상상해 보시고요, 천천히 다음 장소로 가겠습니다. 이번에 살펴볼 곳은 조선중앙일보 사옥입니다. 탑골공원에서 종로를 따라 서쪽으로 걸어가다가 종각이 있는 네거리에서 북쪽으로 꺾으면 바로 보이는 곳입니다. 붉은 벽돌로 쌓은 벽이 눈에 띄는 2층 건물입니다. "
탑골공원
7:20해설 대본 보기
6코스 3.1운동 길 우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민주주의의 시작 3.1운동 이야기 (안내) 배우 박형준 (배역) 송계백(일본의 유학생 독립운동을 국내에 전한 대학생) 다른 곳이 아닌 이곳에서 3.1운동이 시작된 데에는 조금 특별한 사연이 있습니다. 왜 그런지, 그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탑골공원은 1899년경에 생겨났습니다. 공원이 된 장소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원래 절이 있던 곳입니다. 조선시대 세조 때 세운 절인 원각사가 있었습니다. 당시 대리석으로 만든 석탑을 세웠는데요, 흰빛이 난다고 해서 ‘백탑’이라고도 부르는 원각사지 석탑입니다. 원각사가 제 모습을 잃기 시작한 것은 연산군 때입니다. 원각사에 음악을 담당하는 관청인 장악원을 설치했다가, 나중에는 아예 전국에서 모은 기생들이 머무는 공간으로 만들었습니다. 참으로 고약한 일입니다. 연산군이 쫓겨나고 이 자리에 관청이 들어섰는데요, 주변 관공서를 수리할 때 여기 건물의 부재를 뜯어다가 쓰면서 절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흰빛이 도는 대리석으로 만든 10층 석탑은 당시에도 귀하고 눈에 띄는 것이어서 한양의 명물이 되었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에 유명한 시인들이 이 일대에 모였을 때, 이들을 ‘백탑시파’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런 역사를 간직한 곳이었는데, 대한제국 시기에 공원으로 꾸며진 겁니다. 당시 세관 업무를 담당하던 영국인 브라운이 건의를 했다고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누군가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이라고도 말하는데요, 이것도 틀린 말입니다. 최초의 공원은 인천 각국 조계지, 곧 외국인 거주 공간 뒤에 있는 ‘각국공원’으로 나중에 자유공원으로 이름이 바뀐 곳입니다. 그러니까 한국 최초는 아니지만, 한양 최초의 공원이라고는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900년경 이곳에 특별한 건물이 들어섭니다. 바로 팔각정입니다. 팔각형은 원형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데요, 이러한 건물은 왕이나 황제의 권위를 담은 건축물입니다. 예를 들어 1899년에 들어선 원구단의 황궁우 역시 팔각형인데요, 황제의 권위를 드러낸 건물로 평가받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팔각정은 고종이 백성들에게 내린 선물의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당시 대한제국 군악대를 이끌던 프란츠 에케르트가 황제를 상징하는 국가를 작곡했는데요, 군악대가 이 팔각정에서 연주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곰곰 생각해 보면 ‘공원이 생겼다’는 것은 백성들이 자유롭게 모일 수 있는 곳이 생겨났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처음 이 공원은 황제, 나라에서 만든 곳이지만 사람들이 모이면서 이전과 다른 성격을 가진 곳이 되어갔습니다. 1919년 3월 1일, 팔각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것입니다. 황해도에서 온 정재용 선생이 읽었습니다. 정말 감격스러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독립국’과 ‘자주민’의 의미가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나라를 빼앗길 당시에는 황제가 있었지만 나라를 되찾을 때에는 황제의 도움이 필요 없다는 뜻으로 읽혔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며 저처럼 ‘나라의 주인이 나’라는 생각을 했을 겁니다. 이는 3.1운동이 진행되며 조금 더 명확해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3.1운동 과정에서 황실은 역할을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확대된 독립운동은 처음 민족대표가 촉발한 후, 학생들과 선각자들이 움직였고, 곧 온 조선인이 일어섰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주민이란, 앞에서 살펴본 나라의 주인으로서 국민, 또는 시민이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결국 나라를 되찾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정신과 힘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생각은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 더 나아가 이제까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정치제도를 떠 올리게 됩니다. 단군 이래 늘 ‘통치자의 자리에 앉아 있던 왕’을 배제한 정치제도인 공화정을 꿈꾸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바람은,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할 때, 헌법의 기초에 해당하는 임시헌장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는 선언으로 표출되었습니다. 이제 백성은 시민으로, 왕정은 공화정으로 바뀌게 된 겁니다. 독립운동은 일제를 몰아내는 것을 1차 목표로 했지만 최종 목표는 민주공화제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1919년 이후 광복까지 이르는 기간에 독립운동에 뜻을 두었다면 두 개의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3.1운동의 출발점이 된 장소가 탑골공원이라는 것은 굉장히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는데요, 황제의 시간에서 시민의 시간으로 바뀐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탑골공원을 보면 더욱 감회가 새로울 것 같습니다. 지금 탑골공원에는 조선 세조의 정성이 담긴 원각사의 흔적, 그리고 황제의 의미가 담긴 팔각정, 마지막으로 이곳을 시민의 공간으로 바꾼 3.1운동의 흔적이 손병희 선생의 동상과 함께 남아 있습니다. 공간에 시간이 담긴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이를 통해 독립운동이 갖는 미래를 향한 의미, 제국에서 민국으로 바뀐 역사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제 가슴도 뜨거워집니다.
출처: 한국관광공사 오디오가이드 오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