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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박물관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대가야로 1203

대가야박물관은 대가야 왕릉이 모여 있는 지산동고분군의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대가야왕릉전시관과 대가야역사관과 그리고 우륵 선생이 가야금을 창제한 정정골에 위치한 우륵박물관으로 이루어진 대가야와 고령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종합적으로 전시한 국내 유일의 대가야사전문박물관이다. 대가야박물관에는 고령에서 출토된 유물 3,000여 점이 전시되고 있다.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동관을 비롯한 장신구, 긴 목항아리와 원통모형그릇받침 등 토기류, 봉황무늬 고리자루 칼과 갑옷 등 무기류, 재갈과 안장 등 무기류를 비롯하여 반룡사 동종과 석탑, 관내 종택에서 보유하고 있는 교지 등 보물에 이르기까지 많은 유물이 전시되고 있다. 주변 유적으로는 고령 지산동 고분군과 주산성, 고령향교, 고령 지산동 당간지주가 있고, 고아동 벽화고분을 복원하고 실감형 미디어아트를 운영하는 고아리벽화고분모형관, 대가야사람들의 생활모습을 엿볼 수 있는 대가야생활촌, 대가야를 테마별로 전시한 대가야테마관광지, 반룡사, 점필재 김종직의 종가가 있는 개실마을, 암각화공원으로 정비한 고령 장기리 암각화 등 주변에 볼거리가 많다.

이용 정보

이용시간[하절기(3월~10월)]09:00~18:00 (입장 마감 17:00)[동절기(11월~2월)]09:00~17:00 (입장 마감 16:00)※ 자세한 사항은 홈페이지 참조
휴무일매주 월요일 (단,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다음날)
이용요금무료
문의054-950-7103

오디오 해설

현장에서 들을 수 있는 해설 음원입니다. 대본도 함께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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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사시대의 유물인 암각화 [해설] 지금부터 대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만나보실 텐데요. 먼저 바위에 그린 그림을 뜻하는 암각화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문자가 없었던 시대에,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을까요? 바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도 한 방법이었던 것 같습니다. 1971년 한 주민이 양전리 마을에서 이 암각화를 발견했는데요. [주민] 처음 이 그림을 봤을 때 누가 긁어서 낙서를 해놓은 줄 알았어요.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왠지 의미심장한 암호 같기도 하더라고요. 박사님, 여기에 있는 이 동그라미는 뭘 표현한 건가요? [역사학자] 네, 그 원은 태양을 상징한 것이에요. [주민] 그럼, 이쪽에 있는 이 사각형의 그림은요? [역사학자] 이것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요. 사각형 주변에 뻗어 있는 선들 때문에, 울타리에 둘러싸인 마을을 그린 것이라 보기도 해요. [주민] 제가 보기에는 소를 닮은 것 같기도 한데요. [역사학자] 네, 농경사회에서는 소를 신성한 동물로 여겼기 때문에 소의 얼굴을 그린 것으로 보기도 한답니다. 또, 칼집에 칼을 넣은 모양을 그린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요. 이는 남녀의 사랑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요. 당시의 사람들은 풍요와 생산을 기원하면서 그림을 그렸던 거 같아요. [주민] 참, 이 암각화가 있는 양전리 마을을 예전에는 ‘알터’라고 불렀다고 들었는데요. [역사학자] 알은 생명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니까, ‘알터’라는 옛 마을 이름도 생산과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겠네요. [해설] 이 암각화는 청동기 시대 후기에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데요. 그러니까 이곳 고령지역에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고, 그들 나름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죠. 아이들이 그린 것처럼 단순한 점•선•면으로, 수천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각을 더듬어볼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롭지 않나요? 우리가 쓰는 문자보다는 추상적이지만 풍요로운 삶을 바라는 마음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거예요. 선사시대의 고령을 살펴봤으니, 이제 삼한시대로 넘어가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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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한시대의 고령은 어떤 나라였나 [해설] 암각화를 통해 보셨듯이, 이곳 고령은 청동기 시대부터 농경문화를 꽃피웠던 곳입니다. 그렇다면 고령에는 언제부터 나라가 세워졌을까요? 전시물들이 이를 설명해주고 있는데요. 한 나라가 세워질 수 있는 땅이라면 천혜의 자연 조건을 갖추고 있었겠지요? 고령은 가야산과 그 줄기로 둘러싸인 분지예요. 이 가야산에서 영양분이 풍부한 물줄기가 흘러들었기 때문에 아주 비옥한 농경지를 만들 수 있었지요. 이를 바탕으로 삼한 시대에 이르러 국가를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잠시 역사학자의 설명을 들어보시죠. [역사학자 인터뷰] “삼한 시대는 마한, 진한, 변한으로 불리는 문화권이 한반도 남부에 형성되어 있었던 시대를 말합니다. 이 중에서 변한이 고령 지역과 관련되어 있죠. 변한 안의 작은 나라들 중에서 ‘반파국’이라는 나라가 바로 이 고령에서 세워졌습니다. 3세기 후반에 쓰인 <삼국지>에서 이 나라의 이름이 이미 나오고 있는 걸로 봐서, 늦어도 3세기 전반에 ‘반파국’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지요.” [해설] 하지만 이 반파국은 크게 발전하지는 못했어요. 내륙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진 문물의 도입이 다소 늦었던 거죠. 가야시대 후기에 이르러, 고령은 서서히 가야 연맹의 중심지역으로 떠오르게 되지요. 이때부터 대가야라는 나라 이름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은 대가야의 건국에 담긴 이야기를 알아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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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가야의 건국 이야기 [해설] 가야의 건국신화라고 하면 흔히 금관가야의 김수로왕 신화를 먼저 떠올리시는 분들이 많지요. 하지만 고령 지역에는 또 하나의 가야 건국신화가 전해져오는데요. 조선 초기의 지리책인<동국여지승람>에 그 내용이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어요. [<동국여지승람>의 저자] “가야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가 천신 이비가지(夷毗訶之)에게 감응되어 대가야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왕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다.” [해설] 이름이 다소 어렵죠?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가야의 산신이자 여신인 ‘정견모주’가 대가야와 금관가야의 왕을 낳았다는 이야기예요. 우선 여신이 이야기의 중심이라는 점이 흥미롭지요. 아시다시피, 고조선의 단군, 고구려의 주몽, 신라의 박혁거세 등 대부분 남성이 건국신화의 주인공이었죠. 이와는 달리 대가야의 건국 신화에는 여신 숭배 전통이 강하게 담겨져있다고 볼 수 있어요. 또 하나 생각해볼 것은 여신이 대가야와 금관가야의 왕을 모두 낳았다는 것인데요.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김수로왕 신화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여섯 알 중에 하나에서 태어난 이가 김수로왕이고, 나머지 중 하나가 대가야를 세웠다고 하지요. 신화에서도 두 나라 사이의 묘한 긴장과 경쟁 관계가 느껴지지 않나요? 금관가야는 전기가야 연맹의 중심국이었으니, 금관가야 사람들은 자신들의 시조가 대가야까지 세웠다는 신화를 믿었겠지요. 그리고 후기 가야에 와서는 대가야가 그 중심이 되었으니, 대가야 사람들은 자신들의 시조가 금관가야를 함께 건국했다는 신화를 강조하게 된 것으로 보인답니다. 이어서 대가야의 사회와 문화를 잘 보여주는 무덤을 한번 살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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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분에 드러난 대가야의 위상 무덤은 삶과 죽음의 흔적이 묻어있는 곳이라 할 수 있어요. 고대의 무덤은 이에 그치지 않고 한 나라의 문화와 풍습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기도 하는데요. 박물관 위쪽에 위치한 대가야의 무덤들 또한 당시 대가야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유적이에요. 고분군을 둘러보기 전에 무덤이 만들어지던 시기의 대가야가 어떤 위상을 지니고 있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 되겠죠? 서기 400년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가야를 침략했는데요. 고령 지역의 반파국은 내륙이라는 지역 조건 때문에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고 온전할 수 있었어요. 이후, 반파국은 주변의 여러 소국들을 흡수하면서 대가야로 거듭났지요. 이 시기에 막강해진 대가야의 정치권력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고분이에요. 왕릉급의 무덤에서 발견된 많은 양의 토기와 철기들은 당시 대가야의 기술력뿐만 아니라, 왕권이 강화된 국가로서의 면모를 엿보게 해준답니다. 대가야는 이후 중국과 직접 외교관계를 맺고, 국제 교역망을 넓혀 갔지요. 그리고 고구려의 신라 원정을 막기 위해, 군사를 파병할 정도로 나라의 힘을 자랑하게 됩니다. 이 시기의 대가야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유물이 있는데요. 바로 ‘대왕’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목항아리예요. ‘왕 중의 왕’임을 선언한 셈이니, 당시 대가야의 강력해진 힘을 짐작해 볼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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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의 나라, 대가야 [해설] 이번에는 대가야의 철기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고대에는 철 자원과 철기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이 한 나라의 국력을 알 수 있는 기준이 되었어요. 철제 농기구를 이용하여 농업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고, 철제 무기를 통해 군사력도 강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대가야는 당시에 철 산지였던 합천 야로지역을 손에 넣어 풍부한 철 자원을 얻을 수 있었어요. 철의 나라로 불린 대가야의 모습은 <삼국지>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한번 들어보시죠. [<삼국지>의 저자] “변진의 나라에서는 철이 생산되는데, 이웃나라에서 모두 와서 사 간다. 시장에서의 매매는 철로 이루어져서, 마치 중국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았다.” [해설] 화폐 용도로 철을 쓸 정도였다니, 그 생산량이 엄청났던 거 같죠? 박물관에는 철을 만들던 모습을 모형으로 제작해놓은 전시물이 있어요. 진흙으로 만든 용광로에 철광석과 숯을 넣고 불을 지핀 후, 풀무질로 바람을 불어넣어서 용광로의 온도가 1,000도 이상 유지되면 철광석이 녹아 쇳물이 고이게 됩니다. 12시간을 풀무질을 해야 철이 만들어졌다고 하니, 아주 고된 노동이었겠죠? 이러한 과정을 통해 농기구와 무기, 그리고 갑옷을 만들면서 꽃피운 대가야의 철기문화는, 한반도 각지와 일본열도에까지 널리 전파되었죠. 이를 통해 대가야는 국제적으로 더욱 성장할 수 있었답니다. 대가야의 철기를 살펴봤으니, 토기는 또 어떠했는지 알아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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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특한 형식미를 지닌 대가야의 토기 대가야의 토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점토를 반죽하여 구운 토기는 고대인들의 생활에서 가장 필요한 도구였어요. 그래서 당시에도 생산량이 많았고, 또 오래 보존될 수 있어 발굴과정에서 가장 많이 출토되는 유물이죠. 혹시 박물관에 들어서기 전에, 마당에 세워져 있던 커다란 토기 모형을 보셨나요? 그것이 바로 대표적인 대가야 토기로 알려져 있는 그릇 받침이에요. 이는 전시물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요. 대가야 토기는 흔히 신라 토기와 많이 비교가 된답니다. 형태가 비슷하면서도 미세한 차이를 보이는데요. 먼저 바리모양의 그릇받침을 살펴보세요. 대가야의 것은 다리 부분이 부드러운 곡선인데 반해, 신라의 것은 사다리꼴의 직선을 이루죠. 대가야의 그릇받침 위에 놓여 있는 긴목항아리가 보이시죠? 받침과 항아리가 잘 어울리는데요. 둘은 하나의 세트로 사용되었죠. 항아리에는 단추 모양의 뚜껑이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에요. 이에 반해서 신라의 긴목항아리는 뚜껑이 없고, 항아리에 다리가 붙어 있어서 단독으로 사용되었답니다. 대가야의 그릇받침은 바리모양 말고도 원통모양의 것이 또 있는데요. 몸통 부분에 삼각형이나 사각형의 구멍을 촘촘히 뚫어놓은 것이 특징이에요. 무엇보다 뱀 모양의 장식띠를 세로로 붙여서 아주 화려하고 신비스러운 느낌을 주지요. 그래서인지 대가야 토기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요. 제사나 큰 의례가 있을 때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같은 고령의 토기는 대가야가 성장하면서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가는데요. 합천을 넘어서, 남원과 순천에서까지 발견될 정도예요. 그래서 토기는 대가야가 얼마나 뻗어나갔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인 것이죠. 자, 이제 맞은편에 전시되어 있는, 그 유명한 대가야의 금동관을 확인하러 가볼까요?

출처: 한국관광공사 오디오가이드 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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