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형무소역사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통일로 251





서대문형무소는 대한제국 말에 일제의 강압으로 감옥이 지어져 80여 년 동안 우리 근현대사 격동기의 수난과 역사의 현장이자 우리 민족의 항일 독립운동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의 대표적인 탄압기관이었다. 1908년 10월 21일에 경성감옥이란 이름으로 문을 연 뒤 일제에게 우리의 국권이 빼앗기자 이에 항거하는 민족독립운동이 전국에서 거세게 일어나고 일제는 수많은 우리의 애국지사들을 체포 투옥시켰다. 수용인원이 증가하자 그들은 마포 공덕동에 또 다른 감옥을 지었고 이 때문에 1912년 9월 3일에 서대문감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름의 변화만큼이나 많은 민족수난의 역사를 간직한 채 1992년 8월 15일에 현재의 ‘서대문독립공원’으로 개원하였다. 서대문구에서는 1995년부터 서대문독립공원 사적지에 대한 성역화사업을 시작하였다. 조국 독립을 위해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투옥되어 모진 고문과 탄압을 받고 순국하신 애국선열들의 넋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우리 선열들의 자주독립 정신을 일깨워 주는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삼기 위해 새롭게 단장하여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이용 정보
혼잡도 예측
앞으로 일주일간 방문객이 몰릴 것으로 예상되는 정도입니다. 실제 인원이 아니라 상대적인 수준입니다.
- 월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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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보통
출처: 한국관광공사 관광지 방문자추이예측
오디오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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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복판에 빨간 벽돌로 지어진 감옥이 있습니다. 바로 대한독립운동의 성지이자 민주화 투사들이 투옥되었던 서대문 형무소 입니다. 서울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5번 출구로 나오면 서대문형무소의 정문이 보입니다. 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출소 장면을 찍을 때 단골로 등장한 장소인데요, 대한제국 시기에는 의병들이 목숨을 잃었던 장소이고,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의 의지를 꺾지 않은 숭고한 장소이자, 근현대사에서는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던 많은 민주화 열사들이 수감되었던 장소입니다. 1907년,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황제가 강제로 퇴위 당하고, 정미7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자, 이에 반발하여 전국에서 의병들이 봉기하여 일본군과 싸우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사로잡힌 의병들을 감옥에 수감되는데, 잡혀오는 의병들이 늘어나면서, 일본은 새로운 감옥을 만들겠다는 계획하에 1908년 경성감옥을 만듭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1912년까지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이후 서대문 감옥을 거쳐 서대문 형무소가 됩니다. 1920년대부터 지금과 비슷한 형태가 되었고, 수감되었던 재소자들을 강제 동원하여 지었다고 합니다. 입구에서 볼 수 있는 망루는 수감자를 감시하고 탈옥을 막는 용도로 지은 것입니다. 자, 이제 정문입구로 들어가서 표를 구매하면, 본격적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의 관람이 시작됩니다. 의미가 있는 숭고한 장소이기 때문에, 조용한 관람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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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관람할 수 있는 전시관은 서대문형무소의 본관 용도로 사용되던 건물로, 형무소장을 비롯한 일본인 교도관, 형사들이 주로 사용하던 건물입니다. 보기에는 2층의 건물로, 지하에는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한 고문방이 있었던 건물입니다. 독립지사들은 경성법원(구 대법원건물)에서 형식적인 재판만을 받고 오거나, 재판도 없이 끌려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그들이 형무소 대문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향하는 건물이 바로 이 곳입니다. 전시관의 1층과 2층은 서대문형무소의 역사, 의병활동부터 독립운동가, 해방 이후의 서대문형무소까지의 내용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전시되어 있는 유물 중에는 얼굴을 가리기 위해 사용한 용수, 탈주를 막기 위한 족쇄, 교도관들의 호신용 지팡이 등 수감자들을 구속하고 억압하기 위해 사용한 물건들과 재소자가 신었던 고무신, 나무 빨래 방망이들이 있어서 대비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전시실을 지나면 독립운동가들의 수감 당시 모습을 담은 수형기록표가 방 안에 가득 붙어 있습니다. 13살의 어린이부터 60대의 노인까지 민족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다가 이 곳에 수감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부터 숨은 독립운동가들까지 모두 있어서 수많은 애국선열들의 의지를 볼 수 있습니다. 지하에는 독립운동가들을 실제 고문하고 취조했었던 장소가 있습니다. 이 곳에서 자백과 거짓고발을 강요당했던 독립운동가들의 모습과 그들을 고문하는 일본인들의 모습이 마네킹으로 전시되어 있어,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실제 고문하기 위해 사용했던 도구들도 전시되어 있는데, 선 채로 한 명만 들어갈 수 있는 좁은 벽관은 직접 들어가서 체험해 볼 수 있습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하루 이상 갇혀 있었다고 합니다. 지하실에서 나오면 옥사건물과 연결된 중앙사로 가게 됩니다. 실제 옥사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건물이니, 애국지사들의 고통을 생각해보며 걸어가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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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사 건물로 들어서면, 간수들이 사무실로 이용하던 공간과 옥사로 연결되어 있는 문이 나옵니다. 사무실공간은 수감자들의 의식주를 볼 수 있는 공간이 되었는데, 밥의 양을 나누어서 차등지급 한 도구와, 수감자들이 실제 입었던 옷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중앙간수소와 서신실로 들어서면 옥사와 직접 연결되는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 투옥되었던 독립운동가들은 가족들과 서신을 주고받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서로 주고 받는 내용을 검열 받았기 때문에, 형무소의 열악한 상황을 가족들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하거나 고문을 받고 있다는 내용은 쓸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제 옥사건물로 들어오면 2층으로 된 옥사의 복도에 일본인 간수 마네킹이 지켜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각 옥사에는 일제강점기에 수감된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던 모습이 마네킹과 전시자료를 통해 재현되어 있는데요, 열려있는 방에는 직접 들어가 볼 수 있습니다. 1인 감옥이었던 먹방은 빛이 하나도 들지 않아 먹을 칠한것처럼 까맣다고 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문제를 일으킨 죄수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만들어져, 햇빛 한 줌도 들지않아 신체적,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게 만드는 감옥입니다. 옥사들은 감시하기 좋은 구조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무거운 철문으로 문을 쉽게 열 수 없게 만들었고,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볼 때는 방 안이 훤히 보이지만, 방에서 바깥을 볼 때는 한정된 부분만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방 안에 화장실이 같이 있었기 때문에, 여름에는 냄새와 벌레들로 가득해 청결하지 못했고,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잡혀오던 시기에는 15명 이상의 사람들을 한 번에 수감시켜 제대로 먹고 잘 수 없는 환경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옥사를 나와 바깥쪽 벽을 보면 옥사의 통풍구조를 알 수 있는 작은 창이 있습니다. 감옥내의 환기를 위해 설치했지만, 그 작은 창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독방에 수감된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막기 위해 화장실까지 바깥쪽으로 따로 내어서 관리했다고 하는데요, 그 흔적이 역시 바깥쪽 벽에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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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사람들은 옥사에서 지내며 강제 노역에 동원되거나, 고문을 당했으며, 재판결과 사형이 선고된 경우, 형무소 안 쪽에 있는 사형장에서 순국했습니다. 독립운동가에게 재판은 너무나 불리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사형을 선고 받았고, 사형장에서 생을 마감하거나 혹독한 고문을 이기지 못해 병을 얻었습니다. 고문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해 사망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사형을 선고 받은 후, 이동할 때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이 사형장 앞의 미루나무를 붙잡고 한을 토해냈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이 미루나무의 이름이 ‘통곡의 미루나무’가 되었습니다. 사형장 안쪽에도 비슷한 시기에 심어진 미루나무가 있는데, 독립운동가들의 한이 서려서 잘 자라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사형장 건물은 나무로 만든 집처럼 생겼는데, 바깥쪽에서 볼 수 없게 약 5m 높이의 담을 세워서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게 했습니다. 사형의 집행시간도 낮보다는 새벽이나 밤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독립운동가들의 시신은 가족이나 친척이 있는 경우에는 가족에게 인도되는 편이었지만, 연고가 없는 경우에는 무연고 시신 처리 되어 근처 야산에 버려지거나 화장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시신이 나가는 문도 사형장 뒤쪽에 따로 있는데, 이는 정문으로 나가게 되면 조선인들의 분노를 살 것을 우려해서 별도의 문을 만들어 내보낸 것이라고 합니다.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은 이제 아파트에 둘러 쌓인 도심 속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쉽게 놓치고 지나갈 수 있는 장소이지만, 나라를 위해 희생한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의병들, 민주화를 위해 노력한 사람들의 얼이 깃들어져 있는 소중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 입니다.
출처: 한국관광공사 오디오가이드 오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