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시장
부산광역시 중구 신창로4가 일원
부산 국제시장은 1945년 광복이 이후 일본인들이 철수하면서 남긴 물건과 해외동포들이 가져온 물건들을 거래하기 위해 국제시장 자리를 장터로 삼으면서 시장이 형성되었다. 한국전쟁 후 피난민들이 장사를 하며 활기를 띠었던 이곳은 처음에 도떼기시장이라 불리다가 1948년에 건물을 세우고 자유시장으로,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물건까지 취급하게 되면서 국제시장이라는 이름을 갖추게 되었다. 그렇게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해외양품과 미군 부대 군수물자, 수입 밀수품, 전자제품 등 여러 가지 상품 판매로 호황을 누렸다. 오늘날 구제시장 골목, 팥빙수 골목, 화장품 골목, 먹자골목, 소품골목 등등 정말 다양한 볼거리와 함께 부산의 관광 상품으로 자리한 이곳은 한국 근현대사의 숱한 사연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국제시장은 2개의 동으로 나뉘어 있어 미로 같아 처음 온 사람이라면 방향감각을 잃을 수 있는데, 그럴 때는 2층 구름다리로 나와 지금 있는 곳이 어디쯤인지 확인할 수 있다. 구름다리는 12개 동을 잇고 있으며, 이곳에서 내려다보이는 시장의 풍경을 또 하나의 매력이다.
이용 정보
혼잡도 예측
앞으로 일주일간 방문객이 몰릴 것으로 예상되는 정도입니다. 실제 인원이 아니라 상대적인 수준입니다.
- 금혼잡
- 토혼잡
- 일혼잡
- 월여유
- 화여유
- 수여유
- 목보통
출처: 한국관광공사 관광지 방문자추이예측
오디오 해설
현장에서 들을 수 있는 해설 음원입니다. 대본도 함께 확인하세요.
도떼기시장의 원조, 국제시장
3:15해설 대본 보기
이 광활한 국제시장이 역사적 사건들이 겹쳐 만들어낸 우연의 산물이라면 믿으실까요? 조선 중기부터 일본인들이 들어와 살던 이곳 초량왜관 일대는 일제강점기엔 이미 건물들로 빼곡했지요. 당시엔 모든 건물이 나무로 지어져 한 번 불이 나면 금세 큰 불로 번지곤 했는데요, 해방 직전, 연합군의 공습이 계속되면서 그 피해가 막심하다 보니 일제는 현재 조명의 거리로 사용되는 길을 소개지로 비워둡니다. 불이 나더라도 이 거리 너머로는 번지지 못하도록 한 것이죠. 해방 직후 조선 땅을 떠나려는 일본인의 인파가 몰리면서 본국행 배들은 갖고 갈 수 있는 짐의 개수를 제한하게 되고, 많은 이들이 수십 년간 모아온 살림살이를 조선인들에게 헐값에 넘기게 됩니다. 무조건 한 꾸러미에 얼마 하는 식으로 거래된 짐보따리 안에선 돈이 될 만한 살림살이 외에도 고가의 미술품이나 희귀한 고서적들이 심심치 않게 나왔죠. 이 물건들을 마침 비어있던 소개지 골목에 늘어놓고 팔기 시작한 것이 국제시장의 시작이었습니다. 흔히 국제시장을 도떼기시장이라고도 하는데 ‘차지하다, 집어오다’ 는 뜻의 일본어 ‘도리’에서 나온 이름이라고 해요. 그만큼 일본인들의 짐을 먼저 차지하려는 조선 상인들의 쟁탈전이 치열했던 거겠죠.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피난민들이 몰려들고 미군들을 통해 들어온 군수물자가 넘쳐 나면서 국제시장은 크게 세를 불립니다. 하지만 호황도 잠시 53년 1월 대형화재로 시장은 잿더미로 변해버립니다. 작은 술집에서 시작한 불길이 일곱 시간 만에 사천 개가 넘는 상점을 모조리 불태우고 말았죠. 피해액이 무려 14억 원에 이르고 만 명의 이재민까지 발생한 대사건이었습니다. 망연자실해 있던 부산시민들의 힘이 되어준 건 당시 부산 미군 군수기지사령관이었던 위트컴 장군이었습니다. 장군은 하루아침에 집을 잃은 사람들이 기거할 천막촌을 짓고, 학교와 교회를 다시 세우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요. 시민을 지키는 군인의 임무는 전시와 평시를 가리지 않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장군은 평생 묵묵히 부산시민의 안위를 돌봅니다. 덕분에 화마의 상처를 딛고 일어난 국제시장은 90년대까지 미국에서 들어온 원조 물자와 밀수품 등을 취급하며 다시금 호황을 이어갈 수 있었죠. 태어난 순간부터 한 생을 살아가는 동안의 필요한 모든 것이 다 있다던 곳, 그 전성기는 이제 한풀 지나갔지만 여전히 부산을 대표하는 전통시장으로 그 명성을 지켜내고 있습니다.
출처: 한국관광공사 오디오가이드 오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