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깡깡이 예술마을

부산광역시 영도구 대평북로 36

깡깡이 예술마을은 자갈치시장 건너편, 영도대교, 남항대교와 맞닿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버선 형상의 마을이다. 두 군데의 물양장에는 배들이 가득 들어 차있고 십여 곳에 달하는 수리조선소에서는 선박들의 출입이 여전히 활발하여, 항구에서 발원하고 꽃피운 해양문화수도 부산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깡깡이란 수리조선소에서 배 표면에 녹이 슬어 너덜너덜해진 페인트나 조개껍데기를 망치로 두드려 벗겨낼 때 ‘깡깡’소리가 난다 하여 생겨난 말인데, 그 무렵 ‘깡깡이마을’이라는 별칭이 생긴 뒤 지금까지도 그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현재도 십여 곳의 수리조선소와 200여 개에 달하는 공업사와 선박 부품 업체가 마을 공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부산시 발전의 주요 동력분야인 조선산업의 발전사를 고스란히 볼 수 있는 장소이다.

이용 정보

이용시간[주말] - 깡깡이 해상투어 13:00 / 14:00 / 15:00 - 깡깡이 마을투어 14:20 - 깡깡이 통합투어 14:00
휴무일매주 월요일
주차불가능
문의깡깡이 예술마을 안내센터 051-418-3336

오디오 해설

현장에서 들을 수 있는 해설 음원입니다. 대본도 함께 확인하세요.

  • NaN:NaN
    해설 대본 보기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가 한반도 어디쯤 붙어있는지 알 리 없는 이들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멜로디, 국민가요 <굳세어라 금순아>! 한국전쟁 때 발표되어 반세기가 넘도록 한국인들의 혀끝을 맴도는 이 노래가 현인 선생님의 동상과 함께 영도다리의 한쪽 끝을 지키게 된 데에는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요? 부산 사람들에게 영도대교가 특별한 건 대한민국 유일의 도개교라는 명성 때문만은 아니지요. 오히려 처참하던 전쟁 통, 애달픈 삶의 장면이 펼쳐졌던 기억의 공간이기 때문일 겁니다. 1950년 일사후퇴 당시 흥남부두에 고립되었던 많은 피난민들은 남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한 사투 속에 어머니의, 아내의, 누이의 손을 놓치고 쳐버린 채, 부산 땅에 이르게 됩니다. 현인 선생님의 노랫말처럼 말이죠. 목구멍이 포도청이기에 장사치의 길을 택한 피난민들은 유독 부산항 언저리에 터를 잡게 되는 데요, 단지 일거리가 많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오다가다 혹시라도 이별한 피붙이를 마주치지나 않을까, 그리운 이를 어디선가 보았다는 소식이라도 주워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기대 때문이었죠.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어느 날이면 영도다리에 홀로 올라 애먼 밤바다만 원망하며 피울음을 삼켰을 이방인들. 한국전쟁이 겨우 휴전에 이른 1953년에 발표된 <굳세어라 금순아>는 이들의 애 끓는 심정을 낱낱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다급한 피난길, 낯선 땅 어디를 재회의 장소로 해야 할지 몰랐던 이방인들 사이에서 이름으로나마 겨우 알고 있던 ‘영도다리’는 만남의 광장이었습니다. “먼저 부산에 가 있어. 내 따라 내려갈 테니. 우리 영도다리에서 만나.” 고향을 등지고 남으로 떠나야 했던 사람들은 가족들의 손을 놓으며 이렇게 약조를 했더랬죠. 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 오래도록 영도다리 난간마다엔 헤어진 가족의 이름과 나이, 고향을 적은 전단들이 빼곡했습니다. 남포동쪽 다리 아래 바닷가를 따라 점바치 골목이 생겨난 것도 그 때였지요. “우리 어마이 살아는 있담까?”, “언제쯤 고향에 갈 수 있답니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리 아래 점집을 드나들던 피난민들 덕에 전쟁 직후엔 70개가 넘는 점집이 문전성시를 이뤘답니다. 타향살이 설움의 눈물과 기다림의 손때를 머금은 영도다리는 이렇게 한국 현대사의 증인으로 자리를 지켜 왔답니다. 현인 선생님이 부르신 <굳세어라 금순아>가 특별한 노래인 것도 모두 이 다리가 짊어진 기억의 무게 때문일 겁니다.

  • NaN:NaN
    해설 대본 보기

    짭조름한 바다내음에 알싸한 쇳가루의 냄새가 섞여들기 시작했다면 여러분은 깡깡이 마을에 당도하신 겁니다. ‘깡․깡.이’ 듣기도 경쾌한 이 이름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이 마을은 지난 1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우리나라에서 배를 제일 잘 고치는 곳이었답니다. 지금도 골목 곳곳에서 기술자의 손길을 기다리는 대형 선박들을 바로 코앞에서 구경할 수 있지요. 배가 들어오면 수리를 시작하기 전에 가장 먼저 뱃전에 붙은 녹과 해초들, 따개비 같은 것들을 떼어내야 한답니다. 그라인더라는 전동 공구가 나오기 전까진 망치로 하나하나 쳐서 떨어내야 했지요. 쇠망치가 뱃전을 두드릴 때 나는 ‘깡깡’ 소리가 바다 건너 산 중턱에 사는 사람들한테까지 들릴 정도였다니, ‘깡깡이 마을’ 이라는 별명이 붙은 건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그 이름에 걸맞게 이곳에선 배를 만들고 수리하는 데 필요한 모든 걸 구할 수 있답니다. 세계 각지에서 만들어진 배들은 그 국적만큼이나 사용하는 부품들의 생김새도 달라서 매번 맞는 부품을 조달하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은데요, 이곳에선 부품을 만드는 기계까지 자체적으로 제작하기 때문에 전 세계 어떤 선박의 어떠한 고장도 해결할 수 있는 것이죠. ‘깡깡이 마을 공장 열 군데만 거치면 잠수함도 만들 수 있다’ 는 말은 결코 허풍이 아니랍니다. 그런데, 이 마을에서 기나긴 역사를 자랑하는 건 세계 굴지의 수리조선업만은 아니에요. 육지와 이곳 섬을 잇는 도선의 역사도 100년을 훌쩍 넘습니다. 네 개의 다리가 육지까지 뻗어있지만 통통배들은 이곳 영도에선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교통수단이지요. 깡깡이 안내센터가 있는 이 자리에도 바다 건너 자갈치를 오가던 배를 타던 선착장이 있었답니다. 1900년대 초 일본인들이 영도에 대거 이주하면서 다니기 시작한 도선은 2008년에 운행을 중단하기까지 깡깡이 마을 주민들의 발이 되어 주었습니다. 1930년대 영도다리가 생기면서 육지와 영도를 오가는 것이 훨씬 편해졌다고 하지만, 자갈치 쪽을 향해 버선발처럼 뾰족 튀어나온 모양을 한 이곳 깡깡이 마을에선 여전히 바다를 가로지르는 편이 훨씬 빨랐던 거죠. 육로로 15분에 돌아갈 것을 배만 타면 5분 만에 갈 수 있었으니까요. 지금도 영도의 어르신들은 뱃삯을 안내려고 중간에 바다로 뛰어내리는 장난을 쳤던 학창시절과 한껏 멋 부린 차림으로 남포동 음악다방으로 마실 나가던 때를 추억하신답니다.

  • NaN:NaN
    해설 대본 보기

    여러분이 고개 들어 바라보고 있는 이 벽 너머에서 영도의 조선업은 태동을 시작합니다. 현재 <우리조선>이란 이름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이곳은 백여 년 전엔 <다나카 조선소>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다나카 조선소는 대한민국 근대 조선산업의 발상지라 일컬어지는데요, 바람이나 증기 대신 엔진으로 추진력을 얻는 동력선이 대한민국 최초로 개발된 곳이기 때문이죠. 깡깡이 마을의 역사와 풍경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놓은 거리 박물관이 이곳에 들어선 건, 바로 여기가 한 세기가 넘도록 힘차게 박동하고 있는 영도 조선업의 심장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인들이 조선소를 짓기 전에도 이곳 깡깡이 마을엔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 기술로 배를 만들고 고치는 작업장들이 적지 않았답니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자갈치쪽 바다에서부터 이 마을의 심장부까지 들어오는 좁고 긴 만(灣)이 있었는데요, 육지 깊숙이 파고든 바다와 넓은 갯벌 덕에 풍랑이 거의 없어 작은 배를 건조하기엔 더없이 적합했죠. 게다가, 1876년 부산항이 열리면서 조선의 해안까지 들어오는 일본의 고기잡이배들이 잠시 머물며 수리를 받기에도 좋은 위치였구요. 한일합방 이후 일본인들이 이 땅에 조선소나 선박수리관련 시설들을 집중적으로 건설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죠. 1930년대에 들어서 영도의 조선업계는 첫 번째 부흥기를 맞이합니다. 일제의 수탈이 본격화되면서 대형 화물선이 많이 필요했고, 이에 일제가 대대적으로 시설을 확충한 거죠. 작은 배는 육지로 끌어올려 수리하면 되지만, 대형 선박의 경우 배를 육지 가까이에 정박시키고 물을 뺀 다음 작업을 해야 하거든요. 물을 채우고 빼면서 배를 띄우거나 가라앉히는 대규모의 첨단 설비들이 만들어진 것도 그 때였지요. 1940년대 전쟁의 긴장감이 고조되면서, 함정이나 수송선 같은 군사용 선박이 절실해졌고, 일제는 또 한 번 대대적인 투자를 감행합니다. 그 결과 영도는 1000톤 이상 급의 선박을 건조하고 수리할 수 있는 기술과 시설까지 갖추게 되지요. 이런 눈부신 발전이 한반도의 물자를 수탈하고 한국 사람들을 징용하는 데 동원되었다는 점은 안타까운 역사의 이면이 아닐 수 없지만요. 하지만 다행히! 해방 이후 한국 조선업의 두 번째 전성기는 당당히 우리 민족의 손으로 이룩하게 됩니다. 다나카 조선소를 비롯한 일제의 조선소들은 마을의 기술자들에게 분양되었고, 자체적인 기술 개발을 통해 깡깡이마을은 7-80년대 수리조선업의 세계적인 메카로 성장했지요. 그 후로 지금까지 “대평동에 없으면 세계 어디에도 없다” 는 자부심을 엔진 삼아 깡깡이 마을은 뜨거운 항해를 계속하고 있답니다.

  • NaN:NaN
    해설 대본 보기

    ‘마을 안내센터’ 와 더불어 깡깡이 마을에선 다른 곳에서 쉽게 보기 힘든 또 하나의 건물을 만날 수 있는데요, 바로 이곳 ‘생활문화센터’ 입니다. 번듯한 외관에다 마을 다방, 마을 박물관까지 갖춘 이 건물엔 여느 마을회관이나 복지센터와는 다른 특별한 점이 있답니다. 바로 이 건물과 땅 모두 마을의 재산이라는 점이죠. 일본의 사찰이 있던 땅을 해방 후 대평동 마을회에서 사들여 주민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데요, 유치원을 세워 운영하기도 하고, 한국전쟁 당시엔 갈 곳 없는 피난민에게 임시 거처로 내어주기도 했지요. 마을이 공동의 재산을 가진다는 건 이런 도시 지역에선 흔치 않은 일인데, 대평동 사람들은 일찍부터 함께하는 삶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나 봅니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이름 ‘대평동’ 은 지난 60년간 이곳 깡깡이마을의 공식명칭이었습니다. 그보다 더 전에는 바람을 기다리거나 대비하는 포구라는 뜻의 ‘대풍포’ 라 불렸지요. 영도 본섬에서 툭 튀어나온, 낚시바늘 모양의 땅이 자연 방파제의 역할을 해 준 덕에 붙은 이름이었죠. 1920년대 대대적인 매축공사로 땅의 모양이 크게 바뀌고, 해방 이후 행정구역이 정리되면서 대풍포는 ‘대평동’ 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습니다. ‘크게 평안하길 빈다’ 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 덕이었을까요, 80년대까지 ‘대평동에선 개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닌다’ 는 말이 있을 정도로 번성했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평동’ 이란 이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답니다. 80년대 이후 점점 더 대형화 된 선박들이 인근의 큰 조선소로 빠져나가면서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고 마을을 떠나게 되었거든요. 결국 IMF의 거센 풍랑을 맞은 1998년, 대평동은 결국 인근 남항동에 편입되며 그 이름을 잃어버리죠. 하지만 이곳 주민들은 여전히 자신을 대평동 사람이라고 소개할 만큼, 마을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데요, 이 건물의 간판에 여전히 ‘대평’ 이란 글자가 당당히 자리하고 있는 것만 봐도 충분히 짐작하실 수 있겠죠? 일본과 가까운 섬마을이기에 오래전부터 영도엔 사람들의 들고남이 유난히 많았답니다. 해방 후 징용에서 풀려난 동포들과 전쟁에 밀려온 피난민들, 생계를 위해 바깥물질을 하러 온 제주 해녀들까지, 정붙이고 살 곳을 찾아 떠나온 이방인들에게 기꺼이 자신들의 터전을 나누어준 곳이 바로 이곳 대평동이었습니다. 대여섯 평에 불과한 집을 쪼개고 또 쪼개어 쓴 흔적은 아직도 이북동네, 제주 18통이라는 이름으로 이곳에 남아있답니다. 바람이 거셀수록 더욱 많은 배들에게 품을 내어주었던 대풍포의 마음이야 말로 깡깡이 마을의 귀한 유산이 아닐까요.

  • NaN:NaN
    해설 대본 보기

    오래된 아파트 벽면에 그 보다 더 늙어버린 얼굴의 주인공은 깡깡이 아지매입니다. 40여년의 세월을 배에 매달려 두드렸던 망치소리가 이젠 그들의 이름이 되었지요. 기와집 두 채를 합쳐 놓은 크기의 배가 한 척 들어오면 열댓 명에서 서른 명 정도 되는 아지매들이 달라붙어 녹을 떨어내는 작업을 합니다. 3kg이나 되는 무거운 망치를 들고, 배에 매달린 좁고 긴 나무판에 몸을 의지한 채 말이죠. 같은 나무판에 서너 명이 앉아 일을 하니까 누가 움직이기라도 할라치면 판자가 출렁였고, 떨어지지 않기 위해선 온몸이 저리도록 힘을 줘야 했지요. 한 사람이 내려오려면 모두 같이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하루에 20분 정해진 시간 외에는 감히 쉴 수도 없었죠. 당연히 화장실도 맘대로 갈 수가 없었답니다. 고된 노동을 하면서도 물로 입술만 겨우 축이며 갈증을 참아야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죠. 그래도 5미터 높이를 오르내리는 부실한 작업대에서 떨어져 다치는 일만 면해도 다행이라 생각하고 살았답니다. 깡깡이 아지매들이 그렇게 일하고 받는 돈은 마을이 한참 번창하던 70년대에도 하루 천 원 남짓이었습니다. 당시 밀가루 한 포대가 800원 정도였다니 고되게 일해도 빠듯한 살림살이는 쉽사리 나아지지 않았답니다. 그럼에도 깡깡이질을 멈출 수 없었던 건, 아지매들 대부분이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었기 때문이죠. 전쟁으로 과부가 되었거나, 가난을 물려받은 피난민의 자식이거나, 궁핍한 고향을 떠나 무작정 도시로 벌이를 나온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요. 거친 뱃일 말곤 달리 일거리가 없는 이 마을에서 여인들은 박봉에 중노동을 감수해야 하는 깡깡이 아지매가 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둠도 가시지 않은 새벽, 큰 밥 그릇 하나, 물 그릇 하나, 요강 하나를 어린 자식 곁에 놓아두고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근 채 일터로 향해야만 했던 어미들의 가슴엔 피눈물이 맺히고 또 맺혔겠지요. 허술한 작업대에서 보호장구도 없이 맨손으로 망치를 들어야 했던 아지매들은 어깨, 허리, 다리, 결국은 멀쩡했던 청력까지 잃고 맙니다. 하지만 무너져가는 자신의 몸보다 보살피지 못한 자식이 더 아팠던 깡깡이 아지매들. 대평동 대동대교맨션 외벽에 그려진 깡깡이 아지매의 귓불에 걸린 대담한 귀걸이는 그녀들의 잃어버린 청력과 평생에 걸친 지극한 희생에 바치는 훈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출처: 한국관광공사 오디오가이드 오디

위치

이 근처 이렇게 둘러보세요

부산남항
관광지

부산남항

부산광역시 영도구 대평북로 6 (대교동1가)

본 정보는 한국관광공사 TourAPI · 공공누리 제3유형(출처표시·변경금지)를 활용합니다. · 최종 확인일 2026-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