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도사(양산)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통도사로 108
우리나라 3대 사찰의 하나인 통도사는 부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불보사찰이다. 사찰의 기록에 따르면 통도사라 한 것은, 사찰이 위치한 산의 모습이 부처가 설법하던 인도 영취산의 모습과 통하므로 통도사라 이름했고 또 승려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금강계단을 통과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통도라 했으며 모든 진리를 회통하여 일체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에서 통도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며 신라의 자장스님이 당나라에서 불법을 배우고 돌아와 신라의 대국통(大國統)이 되어 왕명에 따라 통도사를 창건하였고 승려의 규범을 관장, 법식을 가르치는 등 불법을 널리 전하였다고 하며 부처의 진신사리를 안치하고 금강계단을 쌓아 승려가 되고자 원하는 많은 사람들을 득도하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건물들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두 차례에 걸쳐 중수하였는데 대광명전을 제외하고는 모두 새로 지은 건물들이다. 통도사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안치하고 있어 대웅전에 불상을 모시지 않고 있으며, 대웅전과 금강계단 등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고 보물로 지정된 청동은입사향완, 통도사 봉발탑 등 26점이 통도사내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통도사 템플스테이는 큰절의 규모에 맞는 규모 있는 템플스테이가 진행된다. 스님들께서 직접 알려주시는 사찰예절을 시작으로 통도사 봉사단체 적멸도량회에서 서비스하는 통도사문화재 해설까지 짧은 시간이지만 핵심적으로 알아야 할 사찰에 대한 지식을 알려준다. 해가 지면 낮 시간 동안 만들었던 연꽃등을 들고 부처님의 사리와 가사가 모셔져 있는 보궁에 들어가 사리탑을 마주 보며 명상에 잠긴다. 오직 이 경험만을 위하여 템플스테이에 참여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보궁명상은 통도사 템플스테이의 핵심 프로그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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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1] 아! 좋다!” [친구2] “거봐 내 말 듣기 잘했지?” [친구1] “바람도 시원하고, 좋다! ” [친구2] “여기가 바로 무풍한솔길이래!” [친구1] “무풍··한솔길? 무풍이면, 바람이 안 부는 소나무 길 같은 거야?” [친구2] “땡! 그게 아니라! 바람이 춤추듯이 불어오고 서늘한 소나무 길이라는 뜻이야!” [친구1] “그래, 바람이 이렇게 시원하게 부는데 무풍이라서 이상하다 했어. 없을 무가 아니라 춤출 무자를 쓰는구나?” [친구2] 그렇지! [친구1] “길이 참 아름답다!” [친구2] “여기가 2018년도에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선정이 됐어.” [친구1] “그랬구나. 어쩐지 아름답더라” [여자] 통도사는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인 자장율사가 영축산에 창건한 사찰입니다. 선덕여왕 15년인 646년이었습니다. 산 이름이 영축산이라 한 것은 산의 모양이 인도의 영축산과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남자]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지고 온 부처님의 사리와 가사, 그리고 대장경 400여 함을 봉안하고 창건함으로써 초창 당시부터 매우 중요한 사찰로 부각되었습니다. 부처님의 사리와 가사뿐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대장경을 봉안한 사찰이었기 때문입니다. 통도사는 신라 불교의 계율 근본 도량이 되었습니다. [여자] 창건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큰 절이 아니고 금강계단이라고 불린 계단을 중심으로 몇몇 법당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고 있습니다. 고려 초에 사세가 확장되어 절을 중심으로 절의 영역을 표시하는 사지석표 즉 국장생석표를 둘 만큼 대규모로 증축되었습니다. 특히 현존하는 중요 석조물이 고려 초기 선종 때에 조성되었으므로, 가람의 정비는 이때 중점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남자] 통도사로 통하는 길은 두 가지가 있는데 입구에서 다리를 건너 차를 타고 가는 길과 무풍한솔길을 걸어서 가는 방법입니다. 통도사 매표소부터 시작된 무풍한솔길은 계곡을 따라 일주문 앞 부도밭까지 이어진 약 1km의 거리입니다. 무풍한솔길은 100~200년 된 소나무들이 사시사철 그 푸르름을 유지하고 있어서 통도사의 운치를 한껏 느끼게 해주는 숲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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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통도사 영산전 앞에 서 있는 이 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렸습니다. 기단에는 기둥 모양이 표현되어 있고, 특히 아래층에는 안상이 얕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을 교대로 올려 조성하였고 지붕돌 처마의 곡선 처리와 귀퉁이에서의 치켜올림이 한눈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석탑은 전체 높이가 약 3.5m이고 구성은 4장의 큰 장대석을 다듬어 지대석을 설치하였습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인 이중 기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상층 기단에는 모서리에 기둥을 새겨 놓고 사이에 버팀 기둥을 두었으며 하층 기단에는 각 면에 장식을 3개씩 조각하였습니다. 이러한 형식은 석탑의 장식적인 기능을 강조하던 통일신라시대 말기, 즉 9세기 이후의 특징입니다. 각 탑신에는 모서리 기둥만 있을 뿐 별다른 조각은 없으며 옥개석은 옥개받침을 4단으로 축소시키고 있어 역시 시대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상륜부는 3층 옥개석 위에 2단 받침형의 갑석을 가지는 노반을 설치하였고 그 위에 복발과 보개가 남아있는데 노반 이상은 원래 이 탑의 부재였는지 의문으로 남아있습니다. [선생님] “우리나라에 석탑이 발생한 시기는 삼국시대 말기, 600년경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제자] “600년경에 석탑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있었다는 건가요?” [선생님]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파된 것이 4세기 후반에서 6세기 말엽으로 보고 있지요?” [제자] “네 맞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그 200년의 세월 동안 우리는 목탑을 건립해왔었습니다. 석탑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은 목탑을 건조하면서 쌓게 되었던 것이죠.” [제자] 아! 그렇겠네요. 목탑을 쌓으면서 쌓인 노하우로 석탑을 건조할 수 있게 된 것이군요?” [선생님] “그렇습니다. 석탑은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제자] “선생님 그런데요. 통도사 석탑은 원래부터 여기에 있었던 것인가요?” [선생님] “아닙니다. 이 탑은 1987년도에 해체, 복원 작업을 거쳤습니다. 그때 원래의 위치에서 약 1.5m 정도 북동쪽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서 있는 위치로 말이지요.” [제자] “탑을 해체, 복원할 때 보통 유물 같은 게 나온다고 하는데 이 탑에는 그런 유물이 있었나요?” [선생님] “물론 있었습니다. 당시 상층기단의 잡석 안에서는 조선시대의 백자가 발견되었습니다. 하층기단에서는 금동소형불상 2구와 청동 숟가락 등이 발견되었구요.” [제자] “청동 숟가락에 조선시대 백자라·· 뭔가 조합이 ·· ” [선생님] “이 탑이 이전에도 한 번 개축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유물로 보고 있습니다” [제자] “아! 그렇구나!” [여자] 신라의 석탑은 8세기 이후 시대가 흐르면서 부분적인 변화가 생기고 전체적으로 작아지는 경향을 보입니다. 대체로 9세기에 들어서면서 점차 변형이 나타나고 9세기 후반에는 현저한 변화를 보이게 됩니다. 9세기 이후 신라의 골육상쟁과 지방 군웅의 할거로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예술성이 위축되고 특히 조형미술은 그 영향을 받아 힘찬 기상에서 가냘픔과 허약함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각기 조형물의 규모가 작아지고 각 부의 양식도 약화되거나 생략되는 변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통도사의 삼층석탑은 탑 앞의 배례석과 함께 통도사의 석조문화재를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입니다. 배례석은 직사각형으로 연화 무늬를 조식하였는데 음각된 명문에 의하면 선종 2년인 1085년에 조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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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통도사 영산전은 언제 건립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숙종 42년인 1716년에 작성된 ‘영산전천왕문양중창단확기문’에 보면 1713년 봄의 어느 날 밤에 영산전과 천왕문이 불에 타 버렸고, 이듬해에 청인, 정안, 낭일, 치원 등 대선사 4명이 기부금을 모아 33명의 목수와 15명의 화승을 동원하여 천왕문과 함께 다시 건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영산전과 천왕문의 암막새에도 강희 53년 갑오라는 내용이 포함된 명문이 남아 있습니다. [여자] 통도사는 상로전, 중로전, 하로전 등의 3구역으로 건물이 배치되어 있는데 영산전은 하로전의 중심불전으로, 앞마당에는 삼층석탑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각각 극락보전과 약사전이 자리하고 있고 남쪽에는 만세루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관광객] “안녕하세요. 스님” [스님] “안녕하십니까.” [관광객] “스님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러는데요. 영산전은 어떤 곳인가요?” [스님] “영산전에 사용된 영산은 영축산의 준말로 사용된 단업니다. 인도의 영축산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법했던 장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관광객] “영축산이 그러면 성지 같은 곳이네요.” [스님] “예, 그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께서 영축산에서 설법하시던 모습과 장소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이 영산전입니다.” [관광객] “영산전에는 어떤 부처님을 모셔놓았나요?” [스님] “영산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관광객] “그렇구나, 고맙습니다. 스님” [스님] “별말씀을요.” [남자] 통도사 영산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인데 특히 앞면의 주간이 옆면의 주간과 2:1의 비율 정도로 넓어서 평면은 길고 네모난 편입니다. 건물 안은 기둥이 없는 통간형으로 뒷면인 북쪽이 아닌 옆면인 동쪽에 별도의 기둥을 세우지 않고 옆면의 높은기둥에 의지하여 불단을 조성했고요. 불단 위에는 석가모니불을 안치하고 후불탱으로 영산회상도를 걸었습니다. [여자] 영산회상도는 석가모니가 제자들에게 설법한 모임을 묘사한 불화로써 사찰 안 대웅전이나 영산전에 봉안됩니다. 영산회상이란 좁은 의미로는 영축산에서 석가모니불의 법화경을 설한 법회의 모임을 뜻합니다. 영산회상탱화는 넓은 의미에서 보면 법화경 변상도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영산회상탱화는 영산회상 구현을 통해 영산 정토에 왕생하려 하는 강한 신앙심의 구체적인 표현이기도 합니다. 영산전 불단의 반대편인 서쪽 벽에는 견보탑품변상도가 그려져 있는데 법화경 견보탑품을 그림으로 푼 국내에서 유일한 변상도입니다.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남자] 통도사 영산전은 살미에 연꽃과 연꽃 봉오리를 새겨 조선 전기의 강직함을 유지하면서도 점차 장식화 되어 가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반면에 제1단에서 5단의 살미 끝부분을 연결한 선은 아직 하나의 직선을 이루고 있지 않아서 조선 후기의 공포와는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반적인 공포의 구성이 조선 전기에서 18세기 이후에 법식화 되기까지 과도적인 모습을 갖춘 건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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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통도사의 봉발탑은 용화전 앞에 서 있습니다. 석가세존의 옷과 밥그릇을 미륵보살이 이어받은 것을 상징하는 조형물로 추측됩니다. 이 탑의 높이는 2.6m입니다. 석등과 거의 같은 구조의 대석 위에 뚜껑을 덮은 큰 바리때를 얹은 희귀한 석조물입니다. 대석은 석등 대석과 마찬가지로 하대석과 간석, 상대석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남자] 하대석은 판석을 깐 넓은 지대석 위에 연꽃을 뒤집어 놓은 모양의 복련석을 놓은 것인데 하반부에는 상하 두 가닥의 테를 돌리고 그 둘레를 8등분하여 기둥 모양 8개를 돋을새김하였습니다. 상반부에는 연꽃 형태를 일정한 형식으로 도안화한 무늬인 중판연화문을 4중으로 새겼고 윗면에는 3단의 낮은 굄을 조각하여 간석을 받치게 하였습니다. [여자] 간석은 단면이 사각형의 모를 깎은 부등변팔각형의 기둥인데, 한가운데에 대나무 같은 마디를 오목새김하고 위아래의 사면을 약간 홀쭉하게 다듬었습니다. 상대석은 연꽃이 하늘을 보고 활짝 피어있는 모양의 양련형으로 만들었고 측면에는 8엽의 복판 연화문을 돌리고 윗면에 3단의 낮은 굄을 마련하였습니다. [남자] 상대석 위에 얹은 돌 바리때는 뚜껑까지의 높이가 1m이고 지름이 90cm가량입니다. 밑에는 아름다운 곡면의 굽을 돌렸을 뿐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았는데 뚜껑에서 굽으로 흘러내린 곡선은 평범한 가운데서도 고고한 조형미를 느끼게 합니다. 이 봉발탑은 연꽃의 조각과 받침 부분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로 추정되지만 받침 부분과 그릇 모양의 조각 간의 간극이 느껴져 동시대 작품인지 의심스럽습니다. 통도사에서는 석호 또는 의발탑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을 용화전 앞에 건립한 데에는 신앙상의 뜻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여자] 불가에서는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가사와 밥그릇인 발우를 의표로 전하는데 이 석조 봉발은 석가모니의 발우를 미래세에 출현하실 미륵불에게 드리기 위해 부처님의 상수제자인 가섭 존자가 발우와 함께 가사를 가지고 인도의 계족산에서 멸진정에 들어서 기다리고 있다는 불경의 내용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석가모니] “가섭아” [가섭존자] “예 세존이시여” [석가모니] “이제 나는 열반에 들 것이다.” [가섭존자] 세존이시여” [석가모니] “56억 7천만 년 후에 미륵이 이 세상에 올 것이다.” [가섭존자] “미륵 부처님이요?” [석가모니] “그래, 그렇다. 가섭 너는 미륵이 출현할 때까지 세상에 남아있다가, 내 법의 신표인 발우와 가사를 미륵에게 전하도록 하라.” [가섭존자] “예! 명을·· 받들겠나이다. 세존이시여” [석가모니] 너를····· 믿고······ 가··마.” [가섭존자] 세존이시여····편히·· 열반에 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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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통도사는 상로전, 중로전, 하로전 등의 3구역으로 건물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대광명전은 중로전의 중심 불전이죠. 통도사의 대광명전은 언제 건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영조 1년인 1725년에 축환 대사가 고쳤는데, 영조 32년인 1756년에 불타버려서 1758년에 다시 건립하였습니다. [스님] “불이야!! 불이야!! 대광명전에 불이 붙었다!” [여자] 1759년에 제작된 대광명전 삼성공필후 현판에 의하면 1756년 10월 21일 자시에 화재가 발생하였고 법당 4위와 승료 4칸, 창고 10칸이 불에 타버렸다고 알려졌습니다. 그 뒤 1758년 1월 7일에 공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스님] “조금 더 빠르게 할 수는 없겠는가?” [십장] “자··자. 속도를 더 내라고! 9월 26일까지 법당 세 채를 지었으니 이제는 단청을 해야 한다!” [인부] “아이고, 날 잡아 잡수. 지금도 충분히 속도를 내고 있다구요!!” [십장] “조금 더 빨리빨리 움직이라고!” [인부] 내가 십장을 하든가 해야지 원·· 더러워서 못 해 먹겠네.” [십장] “아 참 스님? 비로자나불 도금은 시작하셨습니까?” [스님] “단청을 다 하고 난 후에 할 예정이라··한 시가 급하다네.” [십장] “자 다들 스님 말씀 들었지!! 어서어서 놀지 말고 일들 하라고!” [인부] “어휴. 스님하고 십장하고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지··· 아이고 그냥 날 잡아먹어라·· 이놈의 팔자 어휴. 예 예 합니다!! 해요!!!!” [여자] 건물 안에 봉안된 비로자나불상 뒤쪽에 위치한 통도사 대광명전 삼신불로의 화기에는 탱화가 1759년에 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밖에도 대광명전의 기와에도 1758년의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남자] 통도사 대광명전은 비로자나 부처님을 주불로 모시고 있습니다. 비로자나 부처님은 보통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광명의 부처님을 말합니다. 경전 상으로 볼 때 비로자나 부처님은 화엄경의 주불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응신으로 삼고 있는 비로자나 부처님은 때와 장소 및 사람 등에 따라 가변적으로 그 모습을 나타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미혹에 결박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일심으로 생각하고 맑은 믿음으로 의심하지 않으면 어디에서든지 그를 만날 수 있다고 전해집니다. [여자] 우리나라 사원에서 이 비로자나 부처님을 봉안하고 있는 전각을 대적광전 또는 대광명전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전각의 명칭이 붙여질 경우에 보통 비로자나 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우의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을 봉안합니다. [남자] 통도사 대광명전에는 목조 비로자나불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후불벽에는 비로자나불 탱화를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에 노사나불 탱화와 석가모니불 탱화가 걸려 있는데 탱화 원본은 현재 박물관으로 이전되었습니다. 조선 후기 통도사를 기점으로 활동하였던 임한 스님에 의해 조성되었고, 현존하는 삼신 탱화 중 그 화격이 최고로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제석탱화, 천룡탱화, 팔금강탱화 등도 걸려 있습니다. [여자] 건물 내부의 동쪽 서쪽 남쪽 편방부에 화재를 막기 위한 묵서가 있는데 이는 건물의 화재를 방지하기 위하여 사용한 일종의 방화부적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법당 내외에 조각된 목조 비룡의 모습이 사실적인데 이는 조선시대에 발달된 목조 공예의 수법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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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통도사 호혈석에는 전설 하나가 내려오고 있습니다. 먼 옛날 통도사의 백운암에는 젊고 잘생긴 스님이 홀로 기거하며 수행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스님은 경전 읽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아침, 저녁 예불을 통해 자신의 염원을 부처님께 성심껏 기원하고 있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저녁 예불을 마치고 책상 앞에 앉아서 경전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때 밖에서 아리따운 아가씨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아가씨] “거기 계십니까? 제가 나물을 캐러 왔다가 그만 길을 잃었습니다. 그사이 날이 저물어 버려서 여기 불빛을 보고 찾아왔습니다. 어렵더라도 하룻밤 묵어갈 수 있겠습니까?” [스님] “이곳은 저 혼자 수행하는 암자입니다. 남녀가 유별한데 어찌하여서 같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아가씨] 하오나. 산세가 험하고 밤이 깊었습니다. 소녀 이 밤에 이곳을 떠나 산속을 헤매다 호환이라도 당하게 된다면 부모님을 뵐 낯이 없습니다. 그러니 제발 하룻밤만이라도 묵어가게 해 주시옵소서! 스님! 부탁드립니다.” [스님] 하는 수 없지요.” [남자] 젊은 스님은 난처했지만, 어쩔 수 없이 단칸방 아랫목을 그 아가씨에게 내어주고 윗목에서 정좌한 채 밤새 경전을 읽었습니다. 그날 이후 아가씨는 스님에게 연심을 품게 되었고, 결국 상사병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이루지 못할 사랑으로 괴로워하면서 생사의 갈림길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아가씨] “·· 마지막으로··· 한 번만····· 스님 얼굴을 보고·· 싶어요.” [남자] 얼마 후 아가씨는 스님에 대한 사모의 한을 가진 채로 결국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후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그 젊은 스님은 강백이라는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고 많은 학승들에게 경전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호랑이가 나타나 절의 지붕을 넘나들며 포효하였고 문을 할퀴며 점점 사납게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방 안에서 호랑이의 행동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분명 누군가와 사연이 있을 거라고 의견을 모으게 되었고, 각자의 저고리를 밖으로 던져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강백 스님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저고리를 벗어 문밖으로 던지는 순간 호랑이는 더욱더 사납게 울부짖었습니다. [스님] “저의 속세의 인연인가 봅니다.” [남자] 강백 스님은 이렇게 말하고는 주저 없이 문을 열고 호랑이가 있는 곳으로 향하였습니다. 호랑이는 기다렸다는 듯 스님을 물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다음날 날이 밝자 산중 사람들은 모두 모여 사라진 스님을 찾아 산을 헤맸습니다. 스님이 발견된 곳은 젊은 날 경전을 공부하던 백운암이었습니다. 상처 하나 없이 누워있던 스님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신도1] “아니 근데·· 절 내에 왜 호랑이 피를 묻힌 돌을 놓는 거야?” [신도2] “호랑이의 혈을 눌러서 다시는 호랑이가 절 내로 침입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지. 얼마 전에 강백 스님이 호랑이에게 물려갔지 않은가?” [신도1] “그런 일이 있었어?” [신도2] “그래. 일설에 의하면 강백 스님을 사모하다 상사병으로 죽은 아가씨가 호랑이로 환생해서 강백 스님을 물고 갔다고 그러더라고. 그렇지 않으면 시체의 사지는 멀쩡한데 남자의 상징만 없어진 채로 발견되지 않았겠지. 호랑이가 어째 거기만 가져갔냐고 ” [신도1] “아이고, 그래? 사랑이 참 무서운 거야 환생을 해서도 잊지를 못하니 쯧쯧쯧 안됐다. 안됐어” [남자] 통도사에서는 호랑이의 혈을 누르는 목적으로 붉은 호랑이 피를 묻힌 큼지막한 반석 2개를 도량 안에 들여놓았습니다. 이게 바로 호혈석입니다. 통도사의 상로전, 응진전 바로 옆에 한 개가 놓이게 되었고 하로전, 극락전 옆 북쪽에 한 개가 놓여 있습니다.
출처: 한국관광공사 오디오가이드 오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