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용 순절비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조선 인조 때 문신인 김상용 선생의 충절을 추모하고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명종 16년에 출생한 김상용 선생은 장렬 김번의 증손이며 척화파 김상헌의 형으로 문과에 급제한 후 우의정을 거쳐 인조 15년에 순국하였다. 김상용 선생의 증손들에 의해 세워진 비석의 내용은 병자호란 때 김상용 선생이 왕실의 종묘와 빈궁·원손을 수행하여 강화로 피난 온 이후 본 강화수비대의 안일한 전투 대응에 대한 지적과 강화성이 청에 의해 함락되고 김상용 선생이 손자와 함께 남문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순절하기까지의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선생의 위패는 선원면에 위치한 충렬사에 봉안하였다. 순절비는 1976년 강화군 사업의 일환으로 현 위치로 옮겨 세우던 중 숙종 때 세웠던 구비가 발견되어 현재 신·구비를 나란히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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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용 순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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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용 순절비 강화도의 아픈 과거 중 가장 큰 것이 병자호란일 것입니다. 강화도는 몽골도 건드리지 못했던 천해 요새였습니다. 그런데 청나라의 3천 병력에 수많은 백성이 죽거나 포로로 끌려간 전행이 병자호란입니다. 오랑캐 만주족이 세운 나라인 청나라는 한족 정권인 명나라를 중원에서 밀어내고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러나 중화의 정통성이 명나라에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조선은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야만시하다가 결국 병자호란을 겪게 되었지요. 1636년 12월 9일, 꽁꽁 언 길이 된 압록강을 건넌 청군은 파죽지세로 밀려왔고, 일주일도 되지 않아 한양이 함락되었습니다. 강화도로 피난 가려던 인조는 청군에 의해 길목이 봉쇄되어 소현세자와 신하들만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갔죠. 먼저 출발한 인조의 후궁과 왕자들은 강화도에 들어가 있었는데, 이들을 호위하며 함께 간 사람이 바로 김상용이었습니다. 김상용은 도승지·대사헌·형조판서·우의정을 역임한 원로 대신으로, 뛰어난 외교술로 명나라를 상대하는 어려운 일을 맡아 처리하였습니다. 그는 강화도에 있는 동안 남한산성의 소식을 계속 수집하여 의병을 꾸려 남한산성에 지원을 갈 것을 도모하였지만 결국 청군이 강화성을 사방으로 포위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심, 성의 남문루에 올라 폭약 더미 위에 불을 붙인 뒤 그 위에 올라가 자결하였습니다. 이 일로 그의 동생이자 척화 대신으로 알려진 김상헌과 더불어 조선후기절의의 상징이 되었지요. 용흥궁공원에는 김상용의 충의를 추모하고 기리는 김상용의 순절비가 있습니다. 비각 안에는 두 개의 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하나는 김상용의 증손인 김창협이 글을 짓고 김창집이 글씨를 써서 1700년에 세원 것이고, 다른 하나는 원래의 비문이 마모되어 1817년에 다시 세운 것입니다. 고려시대부터 근대까지 저항과 긍지의 숨결이 된 강화도. 치열했던 역사가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고스란히 빛나고 있습니다.
출처: 한국관광공사 오디오가이드 오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