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대온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대온실(大溫室)은 1909년(융희 3)에 완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로 철골구조와 목조가 혼합된 구조체를 유리로 둘러싼 서양식 온실이다. 준공 당시에는 열대지방의 관상식물을 비롯한 희귀한 식물을 전시하였다. 1986년 창경궁 복원 이후에는 국내 자생 식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2004년 국가등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출처 :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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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은 경복궁, 창덕궁에 이어 세 번째로 지어진 조선시대 궁궐입니다. 창덕궁과 함께 ‘동궐’로 불리기도 하였죠. 조선 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경복궁을 법궁으로, 창덕궁을 이궁으로 사용하는 양궐 체제를 이어왔습니다. 태종은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임금과는 다른 궁궐에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한 목적에서 지은 상왕궁이 수강궁이었고, 수강궁은 세종이 즉위한지 얼마 못되어 완공되었습니다. 성종대에 이르러 수강궁은 동편으로 크게 확장되어 당시 세 대비였던 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의 처소로 삼았으며, 수강궁을 확장하는 공사 중에 그 이름을 창경궁으로 고쳐지었습니다. 이처럼 창경궁은 애초 궁궐로서 계획된 건물이 아니라 생활공간을 넓힐 목적으로 세워졌습니다. 따라서 조선의 주요 궁궐과 비교해 보면 배치나 규모에서 다른 점이 많습니다. 먼저, 창경궁의 정문 흥화문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남쪽을 향하고 있는 경북궁의 정문 광화문과 창덕궁 정문 돈화문과 다른 점이지요. 또, 다른 궁궐은 정문에서 궁궐의 가장 중요한 공간인 정전까지 가려면 3개의 문을 통과하는데 창경궁은 2개의 문만 지나면 됩니다. 궁궐의 일반적인 격식과는 조금 다르다고 볼 수 있어요. 규모적인 부분에서 창경궁은 전각의 수가 많지 않고 아담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활공간으로 발전해 온 궁궐이기에 내전이 외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넓은 것도 특색입니다. 근대에 들어와 창경궁은 한국을 침략한 일본으로부터 매우 참담한 수난을 당한 궁궐이기도 합니다. 일제는 대한제국 황실의 권위를 훼손시키려는 목적으로 1907년부터 창경궁 안의 건물들을 대부분 헐어내었습니다.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여 일반에 공개하고, 1911년에는 이름마저 창경원으로 격하시켰지요. 또한 종묘와 연결된 부분에 도로를 개설하여 궁궐의 맥을 끊었습니다. 이렇게 일제에 의해 크게 훼손되었던 창경궁은 해방 후인 1983년에 와서야 본래의 이름인 창경궁으로 환원하는 동시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서울대공원으로 인계했습니다. 1985년부터 본래의 궁궐 모습을 되살리는 복원공사가 시작되었고, 1986년부터 다시 일반에 공개되었습니다. 창경궁에는 왕실 가족 사이에 일어난 여러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영조와 사도세자, 장희빈과 인현왕후 이야기가 일어난 곳이 창경궁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나요? 이야기의 현장인 창경궁을 방문하여 조선 왕실의 생활 모습을 더욱 생생하게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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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궁] 창경궁의 정문, 홍화문(弘化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홍화문은 창경궁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정문의 자리를 지켜온 문입니다. 창경궁은 조선 성종대인 1484년에 지어졌는데, 문의 이름은 당시 의정부 좌찬성이었던 서거정이 지었습니다. ‘홍화(弘化)’는 조화를 넓힌다는 뜻입니다. [김내관] “당시에 한양도성 동북쪽에 똑같은 이름을 문이 있었는데, 백성들의 혼란을 막기 위해 중종전하께서 동북쪽 문의 이름을 바꾸셨어요. 그 문의 이름이 ‘혜화문(惠化門)’이지요.” [김상궁] “지금의 창경궁 윗동네가 혜화동이던데, 거기서 동네 이름이 생긴 거군요.!” [김내관] “그렇지요! 또 지금은 홍화문 앞이 도로와 병원이지만, 예전에는 넓은 공터여서, 이 앞에서 과거시험을 치르기도 했고, 백성들에게 쌀을 나눠주기도 했어요.” [김상궁] “그런데, 보통 조선왕실의 궁궐은 정문을 남쪽으로 내지 않나요? 홍화문은 아무리 봐도 동쪽 방향인 것 같네요.” [김내관] “동쪽이 정문이 된 건 바로 종묘 때문이라 추측하고 있어요. 창경궁 아래쪽에 왕실의 사당인 종묘가 있잖아요. 그래서 창경궁을 지으면서 남쪽으로 정문을 내게 되면, 종묘의 영역을 침범하게 되니까, 문을 동쪽으로 낸 것이지요.” [김상궁] “생각해보니 그렇네요.입장권 끊으러 가면서 문 안쪽을 슬쩍 봤는데 바로 정전으로 이어지는 다리가 나오는 것 같은데요?” [김내관] “창경궁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안에 들어가서 할 수 있으니, 어서 입장권 들고 같이 가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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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내관] 홍화문을 지나오면 바로 정면에 금천을 건널 수 있는 옥천교(玉川橋)가 나옵니다. 옥천교는 1483년에 세워진 이후 이 자리에 계속 있었습니다. 옥천교의 아래를 흐르는 금천은, 서울 안에 남은 5개의 궁궐 중에 유일하게 자연수가 흐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상궁] “홍화문으로 들어오시면, 가운데 볼록 튀어나온 길이 있어요. 이 길을 ‘어도(御道)’라고 하는데, 이름의 의미대로 임금님만 밟을 수 있는 길이지요.” [김내관] “옥천교의 난간을 보시면, 직사각형의 돌판에 두 개의 구멍을 뚫었습니다. 이 구멍은 난간의 장식역할도 하지만, 바람이 통하게 하는 구조적인 장치입니다. 이 구멍을 ‘풍혈(風穴)’이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바람이 지나는 구멍’이지요.” [김상궁] “직사각형의 돌판은 풍혈이 있는 판이라고 해서, ‘풍혈판(風穴板)’이라고 합니다. 기둥난간 장식 사이에 이 풍혈판을 끼워서 조립하는 방식으로 다리의 난간을 완성한 것이지요.” [김내관] “난간의 양 끝에는 궁궐을 지키는 상서로운 동물인 ‘서수(瑞獸)’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서수는 상상의 동물이기 때문에,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아요.” [김상궁] “옥천교의 모습을 그린 그림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동궐도(東闕圖)’입니다. 옛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는 건 일제강점기에 찍은 사진이 있는데, 지금의 옥천교와 같은 모습이에요.” [김내관] “옥천교는 실제로 2005년에도한번수리를진행했는데, 이 때 난간 기둥석 연결 부분에 홈이 파여 있어서 난간들을 조립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답니다.” [김상궁] “다리 아래쪽 아치의 사이에는, 귀신의 얼굴인 ‘귀면(鬼面)’을 조각해서, 물에서 올라오는 삿된 것을 막는다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김내관] “자, 옥천교를 걸으며 설명을 끝냈으니, 이제 바로 앞에 있는 명정문으로 들어가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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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내관] “김상궁! 보따리는 다 챙겼어요? 급히 가는 것이라지만, 그래도 최대한 다 챙겨야 합니다!” [김상궁] “김내관은 전하를 모시고 가는 거에요?” [김내관] “네, 김상궁은 중전마마를 모시고 가는 것이니, 어서 가야할거에요!” [김상궁] “알겠어요, 나는 마마를 모시러 갈 테니, 얼른 전하께 가보세요!!!” [김내관] 조선왕조실록에서 명정문에 대한 기록 중 특이한 내용이 있는데, 즉위한지 2년밖에 안 된 왕과 왕실가족이 명정문을 통해 피난 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명정문에서 수원으로 피난을 간 임금님은 16대왕 인조로, 북쪽에서 내려오는 이괄의 군대가 임진강을 건너왔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 간 것입니다. 이 사건은 ‘이괄의 난(1624)’이라 불리는 사건으로, 조선의 역사에서 신하가 난을 일으켰을 때, 임금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간 유일한 사건입니다. 인조를 비롯한 왕실 가족들은, 명정문 앞에 피난을 가기 위한 가마와 말을 준비해서 떠나는데, 급하게 가느라 나인이나 신하들 중에는 피난길을 걸어서 따라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인조는 재위 중 3번이나 도성을 떠나 피신하는데, 첫 번째가 이괄의 난, 두 번째가 정묘호란(1627), 세 번째가 병자호란(1636)입니다. 마지막 병자호란때는 남한산성에서 포위되어 항전하다가, 결국 항복하고, 씁쓸하게 서울로 돌아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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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내관] 창경궁의 명정전은 현존하는 궁궐의 정전 중에 가장 오래된 건물입니다. 명정전은 원래 성종 때 처음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탔고 지금 있는 건물은 1616년에 재건된 건물입니다. 그래서 조선중기 왕실건축을 대표하는 건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김상궁] “정전이지만 다른 궁궐의 정전처럼 2층이 아니네요? 안쪽을 봐도 천장이 조금 높은 1층 건물로 보여요” [김내관] “창경궁은 처음부터 왕이 나들이 할 때 머무르는 별궁인 ‘이궁(離宮)’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전각들의 규모가 작은 편이지요.” [김상궁] “이궁에 있는 정전이라 규모가 작은 것이라면, 중요한 국가행사보다는 왕실의 잔치나 작은 행사들이 주로 열렸겠네요.” [김내관] “그렇지요. 이 곳은 보통 왕실가족의 연회를 여는 자리였지만, 세자 책봉, 과거 급제자 발표, 백성들을 위한 양로연 등을 열기도 했었어요.” [김상궁] “명정전이 창경궁의 중심이 되는 곳인 만큼 ‘정사를 밝힌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름처럼 밝은 정치를 백성들에게 펼친 곳이네요!” [김내관] “그럼요! 실제로 의궤나 왕실 그림 중에, 명정전에서 잔치를 여는 그림들이 남아 있어서, 명정전의 모습과 당시 상황을 알 수 있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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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궁] 문정전은 창경궁이 처음 지어질 때부터 있었던 전각입니다. 문정전의 용도는 시대에 따라 계속 변하는데, 대비마마의 처소, 왕실의 혼전, 임금님의 편전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됩니다. 지금 창경궁의 문정전 건물은 후대에 복원한 건물입니다. [김내관] 문정전이 지어진 초기에 연산군은 이 곳에서 연회의 음악을 연주하는 악사들의 실력을 구경했습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이른 아침부터 왕이 문정전에 친히 나와 ‘광희(廣熙,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의 연주를 보았다’고 합니다. 또한 전국에서 올라온 기생이었던 운평(運平)들 중에, 재주와 품격이 있는 사람을 빨리 골라 문정전으로 보내라고 하는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연산군은 문정전을 여흥의 장소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김상궁] “그렇지만, 문정전에서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은, 1762년에 사도세자께서 뒤주에 갇히신 일이지요.” [김내관] “여러 영화와 드라마에서 나온 이야기지만, 조선의 역사에서 후계자인 왕세자가 쌀을 넣어 보관하는 뒤주에 갇혀서 굶어 죽은 이 사건은 정말 충격적인 일이었지.” [김상궁] “성군이라 칭송받는 영조전하께서 정확하게 어떤 마음으로 아들을 가두셨는지 모르겠지만, 너무 안타까운 일이지요.” [김내관] “이 곳에 있었던 뒤주는, 나중에 선인문 앞 공터로 옮겨지게 되는데, 사도세자께서는 결국 뒤주에 갇힌 채로 생을 마감하셨지요.” [김상궁] “이 후에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전하가 즉위하면서,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위로하고, ‘장헌세자(莊獻世子)’라는 시호를 올리게 되지요. 우리가 아는 사도세자 라는 이름은, 아들을 가두라고 했던 아버지, 영조전하께서 세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린 것입니다. 이름의 뜻은 ‘서럽게 생각한다.’ 즉 아들의 죽음을 애타게 생각한다는 의미입니다.
출처: 한국관광공사 오디오가이드 오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