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백제박물관
서울특별시 송파구 위례성대로 71 (방이동)





한성백제박물관은 서울이 2천 년 역사 도시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 백제왕도 역사와 관련 깊은 유적들을 직접 보호·관리하면서 조사, 연구, 전시, 교육하고 있다. 서울의 고대 역사·문화를 조명하고, 문화유산의 의미와 가치를 되새기는 박물관이다. 박물관 로비에서 가장 먼저 마주치는 상징전시물은 풍납토성 성벽 단면 으로 성벽 단면을 얇게 떼어내 전시, 연출하였다. 제 1전시실은 서울의 구석기문화, 신석기문화, 청동기 및 초기철기문화를 한강유역이라는 공간에 맞춰 이야기로 꾸며져 있다. 제 2전시실은 제가 지금의 서울에서 건국하고 성장 및 발전하던 한성도읍기 493년을 다루고 있으며, 제 3전시실에서는 한강에서 벌어진 백제, 고구려, 신라의 각축과 한성함락 이후의 백제 역사를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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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관광공사 관광지 방문자추이예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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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의 건축기법 우리의 역사 속 한성백제를 되새겨놓은 박물관에 오셨습니다. 가장 먼저 만나보실 유물은 풍납토성의 성벽 단면인데요. 약 2천여 년의 시간을 거쳐 우리 곁에 남아 있는 풍납토성은 백제 한성 도읍지의 상징이 되는 유적이죠. 박물관 로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풍납토성의 성벽 단면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너비 43미터, 높이가 10여 미터인 실제 성벽 단면을 얇게 떼어내서 전시하고 있기 때문에, 켜켜이 이어 붙인 흙더미의 층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흙으로 쌓은 성은 홍수나 외부의 충격에 금방 무너질 거 같기도 한데요. 어떤 건축공법이 숨어 있기에 이토록 오랫동안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일까요? 이 풍납토성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살펴보도록 할게요. 먼저 성벽 가장 밑쪽에는 뻘을 깔아 기초를 다지고, 흙을 쌓아갔는데요. 이때 활용된 건축공법이 바로 판축기법이에요. 전시된 성벽 단면 앞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기둥이 세워져 있고, 그 사이에 나무판을 대어 놓았는데요. 이 사각의 틀 안에 고운 흙을 넣고 다졌어요. 그다음 잔 나뭇가지와 잎사귀를 깔고 잘 다진 흙을 20센티미터 간격으로 마치 시루떡을 쌓듯이 한 층 한 층 쌓아올렸어요. 이를 부엽공법이라고 하죠. 마지막으로 성벽의 안팎은 강돌로 덮어서 흙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고 성벽에 스민 물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 같은 방식으로 3.5km나 되는 토성을 쌓으려면 적어도 연인원 2백만 명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풍납토성은 3세기 중엽 이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 시기에 한성백제의 왕권이 강력해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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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의 성,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박물관의 제2전시실에 들어서면, 중앙 전시관에 한성백제의 풍경을 모형으로 재현해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형은 둘로 나뉘어 있는데요. 나루터를 경계로 왼쪽은 몽촌토성, 오른쪽은 풍납토성을 중심으로 한성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백제는 항상 강을 끼고 왕성을 쌓았는데요. 이후 백제의 도읍이 되는 웅진과 사비도 마찬가지예요. 강을 통해 이웃 나라의 침략을 막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서해로 통할 수 있어 해상 교역에도 유리했기 때문이죠. 그럼, 백제의 건국과 성장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기원전 18년, 온조왕은 한강 남쪽의 위례성에서 백제를 세웠습니다. 당시 백제는 한강 중부 이남 지역의 여러 소국들 중 하나였는데요. 이후 3세기 중엽에 백제는 크게 성장합니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위례성을 더욱 크게 만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지금의 풍납토성은 성벽 둘레가 3.5km에 이르는 매우 큰 성인데, 아마도 이 무렵에 그 기초를 만들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백제는 근초고왕 때 이르러 전성기를 맞는데요. 근초고왕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있는 한성을 도읍으로 삼았어요. 모형을 보면, 각각의 토성 안에 궁궐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풍납토성에 거처를 두고 있던 근초고왕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서 강력한 왕권을 보여주기 위해 몽촌토성에 새로 왕궁을 지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원래 있던 풍납토성의 기능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죠. 당시 한성은 평지에 지어진 성인 풍납토성과 산성 역할을 하는 몽촌토성으로 2성 체제를 갖추었던 건데요. 이후 풍납토성의 궁궐은 정궁, 몽촌토성의 궁궐은 별궁으로서 백제의 왕이 살았을 것으로 보고 있답니다. 결국 위례성과 한성은 모두 같은 지역에 세워진 도읍으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일대인 것입니다. 백제가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도읍지의 이름과 그 모습이 변화해간 것으로 볼 수 있는 거지요. 한성의 전체적인 모습 모형을 통해 한성의 전체적인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안에는 주로 왕을 비롯한 지배층이 살았을 것으로 보이는데요. 토성 내부의 건물터를 토대로 재현한 모형을 보면, 궁궐과 정원, 관청 등이 성 안에 위치해 있지요. 또 한성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 중 하나는 왕과 지배층의 무덤이 있는 능역인데요. 왼쪽 모형에서 몽촌토성의 서남쪽에 있는 석촌동 고분군이 대표적입니다. 백제의 최고위층 사람들이 많이 묻혔을 것으로 보고 있지요. 그럼 일반 주민들은 어디에 살았을까요? 모형에서 주거지를 보면, 성 바깥에서 살았던 주민들도 많았음을 알 수 있는데요. 2004년에 풍납토성의 동쪽 성 밖에서 우물이 발견되어 주민들이 그 인근에 많이 살았음을 추측할 수 있었죠. 몽촌토성 주변지역도 한번 살펴보세요. 남쪽 성문 아래에 있는 주거지가 대표적입니다. 주거지의 평면 모양이 6각형인데, 이는 한성백제의 전형적인 주거 형태랍니다. 두 개의 성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는 한성의 모습을 잘 살펴보셨나요? 한성백제는 이 같은 도읍을 중심으로 완전한 고대국가로서의 틀을 갖추어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어서 전시되어 있는 유물들을 살펴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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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에서 발견된 토기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서 발견된 토기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토기는 일상생활에서부터 각종 의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에, 생산량도 많고 오래 보존될 수 있어서 발굴 과정에서 가장 많이 출토되는 유물입니다. 특히 풍납토성에서 발굴된 토기들은 양도 많고 질도 높아서 한성백제시대에 도읍에 있던 기술자들의 토기 제작기술이 얼마나 높은 수준이었는지를 보여주는데요. 그 때문에 지방에서 출토된 토기가 그 지역에서 생산된 것인지, 한성의 최고 기술자들이 만든 것인지 구분이 될 정도라고 해요. 전시된 토기들을 한번 살펴보세요. 붉은빛을 띠는 토기들은 3세기 초반에 제작된 것인데요. 토기의 색깔은 제작 과정과 관련이 있습니다. 토기를 구울 때 가마에 산소가 많이 들어가도록 해서 산화가 진행되어 붉은빛이 돌게 되는 거죠. 이후 3세기 후반에 제작된 토기들은 주로 회색을 띠는데요. 이는 가마 안에 산소가 부족하도록 만들어서 토기를 구웠기 때문입니다. 토기의 형태를 살펴보면, 다리가 있는 ‘굽다리접시’나 공 모양의 둥근 몸체에 목이 짧고 곧은 ‘곧은입항아리’, 그리고 접시 모양의 몸체에 다리가 세 개 달린 ‘세발토기’가 있어요. 특히 윗부분이 소반처럼 생긴 ‘반형 세발토기’는 한성백제시대에만 유행해서, 대표적인 유물로 손꼽힌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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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촌토성에서 발견된 뼈갑옷 전시되어 있는 뼈갑옷은 몽촌토성에서 발견된 것이에요. 갑옷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몸과 다리 등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구이죠. 갑옷은 형태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요. 여러 개의 판을 잇대어 만든 것을 판갑이라고 하고, 물고기 비늘 모양의 쇳조각을 수십에서 수백 개 이상 연결하여 만든 것을 찰갑이라고 하죠. 판갑에 비해 찰갑은 갑옷을 착용한 사람이 좀 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해준답니다. 전시된 뼈갑옷은 완전한 형태로 출토된 것이 아니라, 찰갑을 이루는 조각인 소찰들이 발견된 것이에요. 소찰은 흔히 철로 만드는데, 몽촌토성의 소찰은 소뼈로 만든 것이어서 뼈갑옷이라고 부르는 거지요. 출토된 소찰을 자세히 살펴보세요. 각각의 규격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이는 몸의 부위별로 정밀하게 수치를 계산해서, 각 부분을 별도로 제작했기 때문이랍니다. 소찰의 크기만 다른 것이 아니라, 연결 구멍의 지름까지도 차이를 둬서 굉장히 정교하게 갑옷을 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백제의 갑옷 제작 기술은 더욱 발전해서 화려한 황동 갑옷을 만들기도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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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에서 발견된 토기들 한성백제의 무덤에서 출토된 토기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중에서 흑색을 띠는 마연 토기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는데요. 마연토기는 토기를 빚을 때 가장 마지막에 끝이 뭉툭한 자갈 등을 이용해서 표면을 치밀하게 문질러서 굽는 기법을 말합니다. 마연 토기가 흑색을 띠는 것은 치밀하게 문지른 면에 훨씬 더 많은 양의 탄소가 흡수되기 때문이랍니다. 흑색 마연토기 기법은 칠기의 재질감을 모방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요. 각종 용기나 기물에 옻칠을 한 칠기 제품은 토기보다 훨씬 더 고급품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이 질감을 토기에 적용해서 격을 높인 것이지요. 흑색 마연토기는 장인의 숙련된 기술을 필요로 하고 하나의 토기를 만드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고급품으로 여겨졌습니다. 백제 토기의 초창기에 마연토기가 처음 등장한 후, 점자 확산되어 특정한 토기 양식이 됐답니다. 몽촌토성 주변의 중심 고분군이나 지방 유력자들의 무덤에서 흑색 마연토기가 많이 발견되었는데요. 고급 그릇이어서 지배계층의 위엄을 상징한 것이었지요. 이 흑색 마연토기는 고구려에서도 제작되었는데요. 하지만 흑색 마연토기 중에서도 다리가 세 개인 ‘세발토기’나 목이 짧고 곧은 ‘곧은입항아리’는 백제 토기의 핵심으로 고유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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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의 위용을 보여주는 전돌과 기둥장식 전돌과 기둥장식은 건물을 장식하는 데 쓰이는 건축자재입니다. 먼저 전돌에 대해서 살펴볼게요. 전돌은 나무틀에다 진흙을 넣어 모양을 만든 다음 건조시키고 구운 벽돌을 말합니다. 전돌은 돌에 비해서 다양한 모양과 장식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에 건물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데 아주 유용했습니다. 중국에서는 대부분의 건물에 이 전돌을 사용을 했지만, 한국에서는 그러한 경우가 별로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서 많은 양의 전돌이 발견되어서 그 의미를 더한답니다. 전시된 전돌을 살펴보면, 대체로 격자무늬나 평행선을 새겨 장식한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바닥에 깔았을 것으로 보이는 전돌에 새겨진 선들은 미끄럼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보기도 하지요. 이 전돌과 더불어서 기둥장식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는데요. 풍납토성의 주거지 등에서 출토된 기둥장식은 흙으로 빚은 다음, 건물 기둥의 밑둥을 감싸서 받치는 데 사용되었어요. 기둥장식의 바깥 모양은 8각, 9각, 10각 등으로 다양하고 안쪽의 모양은 기둥을 넣기 위해 원형으로 만들어졌지요. 이러한 전돌과 기둥장식으로 궁궐을 비롯한 성 안의 중요한 건물들이 화려하게 장식되었을 것으로 보인답니다. 전돌과 기둥장식은 장인이 만드는 특수제작품이기 때문에 백제의 건축 기술의 전문성도 엿볼 수 있습니다.
출처: 한국관광공사 오디오가이드 오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