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호서원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호로 250-11





이 서원은 조선조 대학자였던 모당(募堂) 손처눌(孫處訥)(1553~1634), 사월당 류시번(柳時藩), 양계(暘溪) 정호인(鄭好仁), 모당의 6대 조인 격재(格齋) 손조서(孫肇瑞) 네 분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모당 손처눌의 자는 기도(幾道)이며, 한강(寒岡) 정구문하(鄭逑門下)에서 사사(師事)하여 학행과 효우로 스승에게 인정받았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의병대장으로 활동하였다. 난리(亂離) 중 부모상(父母喪)을 당하였으며, 이를 옳게 못 모신 것을 한탄하면서 임진왜란이 평정되자 종신여모(終身廬慕)한다는 뜻에서 자기 거처를 영모당(永慕堂)이라 하였다. 난(難) 후 그는 후진 양성에 전념하여 영모당은 언제나 문전성시(門前盛市)를 이루었고 '영모당통강제자록(永慕堂通講諸子錄)'에는 제자 202명의 명단이 적혀 있어 당시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마을 앞에 청호지(靑湖池)를 만들어 영농에도 힘썼으며, 조정에서의 논공행상도 사양하였으며 다만 대구향교의 최고 책임자인 도유사(都有司)를 12년간 맡았다. 손조서는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대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한림학사로서 필재(畢齋)와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고 단종 때 봉산군수(鳳山郡守)로 있다가 단종의 참사 소식을 듣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 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밀양)으로 내려가 후학 교육에 전념하였다. 청호서원 역시 1864년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1947년경 강당만 세웠다가 1968년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969년 강당과 위패를 모신 상인사(尙仁祠)를 중건한 것이다. 서원 입구에 모당선생 유허비(遺墟碑)도 세웠다. (출처 : 행복수성 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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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호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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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서원과 이웃하는 서원, 이곳은 청호서원입니다. 청호서원은 대구 교육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대구 동부권 최고 명문 사립대학으로 볼 수 있겠죠. 현재 수성구가 대구 교육의 중심지인 것처럼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고 하겠습니다. 청호서원은 조선 중기 대구를 대표하는 유학자 모당 손처눌 선생을 기리기 위해 일직 손씨 문중이 건립한 서원입니다. 모당 손처눌은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전반에 걸쳐 활동한 학자입니다. 나라가 어지러우면 목숨도 내놓아야 한다라는 유학의 뜻을 받들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나섭니다. 하지만 난리 중에 부모님을 여의고 부모의 상도 제대로 치를 수 없었던 손처눌은 임진왜란이 끝나자 '영원히 잊지 않고 사모하겠다'라는 뜻의 영모당을 짓고 시묘살이할 정도로 효자였다고 합니다. 손처눌은 대구를 대표하는 유학자이지만 과거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시험에 낙방한 손처눌은 속상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고 해요. 본래 얻고 잃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으니 얻었다고 어찌 기뻐하며 잃었다고 어찌 슬퍼하랴. 예로부터 유분 같은 이도 역시 낙방했으니 때와 인생은 반드시 서로 이어짐을 이제 알겠네. 인생은 타이밍, 열심히 살아가다 보면 세상이 알아주는 때가 올 거라는 손처눌의 믿음이 느껴집니다. 비록 과거 시험은 보지 않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손처눌의 학문을 인정하며 시험에 연연하지 말라고 합니다. 때와 인생은 반드시 이어진다. 가슴속에 남겨둘 만한 글귀가 아닌가 싶습니다.
출처: 한국관광공사 오디오가이드 오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