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밤의 석조전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덕수궁 밤의 석조전]은 전문 해설사와 함께하는 '석조전 야간 탐방'과 클래식 연주를 들으며 고종이 사랑했던 가배차(커피)와 디저트를 즐기는 '테라스 카페 체험', 대한제국 황실의 이야기를 담은 뮤지컬 공연 관람으로 구성되어 있는 덕수궁 야간 관람 프로그램이다. 2021년 시범 사업을 시작으로 높은 만족도와 호응에 힘입어 2022년 정식 개최되었으며, 2023년부터 반기별로 운영되고 있다. 궁인의 안내에 따라 대한제국 황실의 이야기를 품은 덕수궁 석조전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는 특별함을 경험하고, 개화기 소품을 활용한 '인생궁컷' 사진과 기념품을 통해 덕수궁 석조전에서의 밤을 오래 기억할 수 있는 복합 문화 체험 프로그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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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5대 고궁 중 하나인 덕수궁은 1897년에 선포된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옛 이름은 경운궁입니다. 덕수궁은 당초 세조의 장손이자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으로 처음부터 궁궐로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덕수궁이 처음 궁궐로 사용된 것은 임진왜란 때 피난 갔다 돌아온 선조가 머물 궁궐이 마땅치 않아 월산대군의 집이었던 이곳을 임시 궁궐 즉, 정릉동 행궁으로 삼으면서부터입니다. 이후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정릉동 행궁에 새 이름을 붙여 경운궁이라고 불렀습니다. 경운궁은 애초에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궁궐들을 대신하여 거처하던 곳이었기에 창덕궁과 창경궁이 중건되면서 자연스럽게 궁궐의 기능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계기로 다시 역사에 등장하게 됩니다. 을미사변 이후 일본의 압력을 피해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이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한 것이죠. 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중국의 연호가 아닌 독자적인 연호 광무를 사용하고, 군주의 칭호를 국왕에서 황제로 격상시켰습니다. 나라의 이름도 ‘대한제국’으로 바꾸었지요. 이렇게 황제국다운 국가 체제를 갖추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과정에서 경운궁도 황궁으로서 규모와 격식을 갖추게 되었답니다. 하지만 1904년 대화재로 인해 경운궁은 함녕전, 석어당 등을 비롯한 많은 건물이 타게 되었으며,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제에 빼앗긴 을사조약과 고종의 강제 퇴위를 겪으며 경운궁은 그 규모가 대폭 축소되었습니다. 고종에게 왕위를 물려받은 순종은 퇴위한 황제가 덕을 누리며 오래 살라는 뜻에서 ‘덕수’라는 이름을 올렸고, 경운궁의 이름도 덕수궁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덕수궁은 우리의 아픈 역사가 담긴 곳입니다. 대한제국 황실의 궁궐 덕수궁을 거닐다 보면 저마다 사연을 안은 유서 깊은 전각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쁜 돌담길도 있는 덕수궁에서 파란만장한 근대사의 자취를 느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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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궁] 덕수궁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덕수궁은 한양 도성 안에 있는 5개의 궁궐 중 하나이고, 원래는 왕실가족의 집이었습니다. 집주인은 세조의 손자이자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이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14대 왕 선조는 불타버린 경복궁 대신 이 곳에서 머물렀습니다. [김내관] “음. 그럼 전하가 머무르시는 곳이니, ‘시어소(時御所)’라 불러야 마땅하겠네요!” [김상궁] “쯧쯧, 대궐 밖에서는 정릉동에 있는 행궁이라 하여, 벌써부터 ‘정릉동 행궁’이라 한다구요. “ [김내관] “하지만, 곧 광해군께서 이 곳에 이름을 내리실거에요! 내 김상궁에게만 미리 알려주자면,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이름이에요!!” [김상궁] “어머나, 왠지 좋은 일만 가득할 것 같은 이름이네요.!! 그런데,나중에 경운궁에 대비께서 폐비되어 오실거라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진짜에요??” [김내관] “거…. 너무 많이 알면 다쳐요. 인목대비께서 폐비가 되시어 경운궁으로 오시게 되었어요. 광해군 전하와 사이가 좋지 않으니 이것 참…그 때 또 이름이 바뀌는데… 바로 ‘서궁’이지요.” [김상궁] “하지만, 곧 능양군(훗날 인조)께서 반정을 일으켜 경운궁이라는 이름을 다시 찾고, 즉조당과 석어당을 제외한 모든 집과 땅을 월산대군의 후손들에게 돌려 주시겠지요. 그리고 나중에는 사람들이 이 곳을 명례궁(明禮宮)이라 부른다구요. [김내관] “아니 근데, 지금 안내판에는 덕수궁이라고 되어 있는데??” [김상궁] “그 이름은 1907년에 대한제국의 황제가 된 순종황제께서 태황제(황제의 살아있는 아버지를 부르는 이름, 태상황)가 되신 고종황제의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덕수(德壽)’라는 궁호를 내리신 거에요.” [김내관] “덕수궁이라는 이름 자체가 원래 퇴위하신 왕께서 머무는 궁에 붙이는 이름이니, 그러한 것이겠지요” [김상궁] “그래도 경운궁이라는 이름도 좋다는 생각이 드는걸요” [김내관] “어느 이름을 쓸 것인지는 지금을 함께하는 사람들의 선택이지요. 자, 여러분은 과연, 어떤 이름을 선택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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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내관]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은 덕수궁의 역사와 함께 해 온 문입니다. 지금은 대한문이 덕수궁의 정문 역할을 하고 있지만, 원래 덕수궁의 정문은 남쪽에 있던 인화문(仁化門)입니다. 인화문은 덕수궁의 영역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없어졌는데, 동쪽에 있던 대안문(大安門)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大漢門)으로 바꾼 것입니다. [김상궁] “어머, 저기 수문장 교대를 위해 사람들이 나오고 있네요! 뭐라고 하는지 좀 들어보자구요” [무관] “고종황제께서 교지를 내리시니, 그 내용을 만 백성에게 알린다! 이 자리에 대한이란 정문을 세우니, 왕궁 바깥문과 정문의 규모를 다 갖추게 한다.!” [김상궁] “어머, 멋지다아~ 근데 여기 대안문 아니었어요?” [김내관] “황제폐하께서 대한이라는 정문을 세우신다잖아요. 그 동안 쓰던 대안문은 ‘큰 평안이 머무른다’는 뜻이고, 대한문은 ‘큰 하늘의 뜻을 받은 문’이라는 뜻이니, 더 크고 좋은 의미 아니겠어요?” [김상궁] “아, 그래서 벌써 편액을 바꿨군요!” [김내관] “이야기를 보태자면, 고종황제께서 승하하셨을 때 사람들이 모인 곳이 이 대한문 앞이었어요. 지금도 수문장 교대 의식을 보러 많은 사람들이 모이지만, 그때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왔었어요.” [김상궁] “아휴… 하지만 그 뒤에 대한문은 더 불쌍해지잖아요…” [김내관] “그렇지요…일제강점기에 덕수궁 공원화 계획과 도로 확장 때문에 담장도 다 없어지고, 한국 전쟁때는 북한군이 숨는 바람에 폭격을 맞을뻔하기도 했지요.” [김상궁] “1970년대에는 또 어떻고요…태평로 넓힌다고 대한문을 궁궐쪽으로 옮겼잖아요. 앞에 있던 하마비도 금천교 옆으로 옮겼고요.” [김내관] “그래도 대한문이 남아준 덕분에 황실과 우리를 이어주던 소통공간이 남아 있잖아요? 앞으로 우리들이 잘 보존하고 지키면 된다구요!” [김상궁] “그래야죠! 엇, 그 사이에 수문장 교대의식도 끝났으니 이제 표 끊어서 들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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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내관] “정전까지 들어가려면 금천교를 지나서 가는 게 제일 빠르지요! 김상궁 빨리 와요!” [김상궁] “아유, 같이 가요!! 아니, 근데 김내관 지금 어디를 밟고 지나가는 거에요?! 거긴 어도잖아요!” [김내관] “아이코! 폐하를 모시면서 뒤따라 가던 게 습관이 돼서 그만… 자자, 김상궁, 방금 본 건 잊어요!! [김상궁] “흥! 김내관 하는 거 봐서요! 빨리 옆으로 오기나 해요! 어서 조원문을 지나야 한다구요!” [김내관] “응? 어디? 조원문이 어디 있는데요?” [김상궁] “어?!?!?! 아니, 이 문이 언제 없어졌대요?!” [김내관] “1904년에 난 덕수궁 대화재 때 불타버렸잖아요! 이 후에 다시 짓긴 했어도 일제강점기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단 말입니다.” [김상궁] “어쩐지.. 담장이랑 행각들도 전부 없어져 버렸네요.” [김내관] “안타깝지만 어쩌겠어요. 그래도 언젠가 조원문이 복원될거라 기대감을 안고, 걸어가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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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내관]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중화문(中和門)을 지나가야 합니다. 지금은 덕수궁 안의 담장이 대부분 없어졌기 때문에, 다른 방향에서도 얼마든지 들어 올 수 있지만, 예전에는 중화문을 지나야만 했습니다. [김상궁] “이제 이 문만 지나가면 폐하가 계시던 중화전이 나오겠네요!” [김내관] “아직 설명 안 끝났어요! 엣헴….. 중화문은 1902년에 건립되었지만, 1904년 덕수궁 대화재 때 불탔고, 1906년에 다시 짓게 되었습니다. [김상궁] “자, 여러분?! 문의 지붕을 보시면 양 쪽에 잡상(어처구니) 7개가 있지요? 7개의 잡상은 궁궐 안에서도 가장 격이 높은 건물에만 올라갔습니다. 이것을 보고 중화문과 중화전이 덕수궁의 중심이 되는 건물임을 알 수 있지요.” [김내관] “거 참, 내가 하려고 했는데!!! 중화문의 가운데는 황실가족이 이용하는 문이고, 왼쪽은 무관이, 오른쪽은 문관들이 이용하는 문입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넓게 펼쳐진 중화전의 조정과 품계석, 중화전이 보입니다. 중화전의 조정(품계석이 있는 마당)은 대한제국의 흥망성쇠를 함께한 장소인데, 황태자와 황태자비였던 순종황제와 순정효황후의 결혼식이 치러졌습니다. 1907년에는 친일파와 일본의 강요로 고종황제와 순종황제의 대리청정의식이 진행되었고, 이후 순종황제의 즉위식이 열렸습니다.” [김상궁] “언제나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는 법이지요.” [김내관] “세상 이치가 그런거지요. 자, 이쪽 계단을 보시면 중화전 조정에서 중화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습니다. 이것을 답도라고 하는데, 이 곳에는 황제국가를 상징하는 용 두마리가 새겨져 있습니다. [김상궁] “답도를 올라가면 보이는 건물이 바로 중화전이니, 같이 올라가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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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궁]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황제인 고종은 경복궁에서 머무를 때, 부인인 왕비 민씨가 일본인들에게 시해 당하는 사건(을미사변)을 겪었습니다. 자신의 생명도 위협받는다고 느낀 고종은 왕세자(훗날 순종)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대피합니다. [조성훈] “폐하. 지난봄부터 겨울까지의 기간이 지났는데도 환궁이 아직 지체되니 온 나라 신민(臣民)들의 걱정과 의구심이 끝이 없습니다. 속히 경운궁(慶運宮)에 환궁하시어 위로는 묵묵히 도와주시는 조종(祖宗)의 영령을 안심시키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위태로운 마음을 진정시켜 주소서“ [고종] “경의 말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니, 매우 가상하다. 내 마땅히 생각하여 가겠노라.” [김종한] “환궁하심을 종묘와 사직에 고하는 것은 좋은 날짜를 받아서 진행하심이 어떻겠습니까?” [고종] “그리 하도록 하라. 내 직접 글을 써서 보낼 것이니, 모든 신하들이 의식에 참석하라 일러라.” [신하들] “분부대로 따르겠나이다.” [고종] “또한 동궁(황태자)의 효성스러운 생각에 이번 환궁을 결정하게 되었으니, 정성을 보여주는 의식을 진행해야 할 것이다. 이는 동궁이 진행하도록 하라.” [순종] “예, 아바마마. 소자가 준비하겠나이다.” [김상궁] 국가에 근대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고종은 대한제국의 시작을 선포하고, 경운궁(덕수궁)을 정궁으로 삼아 환궁합니다. 중화전(中和殿)은 이러한 배경 속에 황제국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고종황제의 의지를 보여주는 건물입니다. 건물을 지을 때, 창덕궁 인정전과 같은 2층의 건물로 지어서 대한제국의 위엄을 보이고자 했습니다. 중화(中和)라는 이름의 뜻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겠다는 뜻으로, 당시 강대국의 이권다툼에 둘러 쌓여 있던 대한제국 황실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이렇게 공들여 지은 중화전은 안타깝게도 1904년에 일어난 덕수궁 대화재로 인해 소실되었습니다. 그리고 1906년에 1층으로 다시 지은 중화전이 지금까지 남아 있지요. 안쪽 천장에는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두 마리의 용을 장식해서, 위엄을 보여주고, 곳곳에 황제국만이 사용할 수 있는 황색의 장식들도 볼 수 있답니다.
출처: 한국관광공사 오디오가이드 오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