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강화 원도심 스토리워크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길27번길 10

강화읍의 숨겨진 역사와 문화를 직접 걸으며 강화의 역사, 산업, 종교를 한눈에 만날 수 있는 강화 스토리워크는 강화 역사만이 아닌 대한민국 근대사와 연결돼 있기에 더욱 의미 있는 곳이다. 강화의 전성기를 느낄 수 있는 심도직물(터), 한옥으로 지어진 가장 오래된 교회인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강화에서 일어난 대규모 만세운동을 기념한 강화 3·1 독립만세 기념비, 한국 천주교의 노동 문제를 적극적으로 개입한 첫 사건을 기념한 노독사목 표지석, 고려시대부터 강화읍의 한편을 지키고 있는 700년 은행나무, 강화 직물 이야기를 소개한 이화견직 담장길,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식 방직 공장이었던 조양방직, 강화의 독립운동의 현장인 강화중앙교회, 합일초등학교 독립운동길, 강화의 전통이었던 직조산업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소창체험관까지 이어진다. 친환경 전기자전거를 타고 고려궁지 등 주요 관광지를 둘러보는 여행상품도 운영 중이다.

이용 정보

이용시간[내 맘대로 강화 원도심 도보 여행] - 상시 개방 [해설사와 함께하는 강화 원도심 여행 도보 해설 투어] - 10:30 - 13:30
휴무일연중무휴
주차불가능
문의강화군 문화관광과 032-930-3125

오디오 해설

현장에서 들을 수 있는 해설 음원입니다. 대본도 함께 확인하세요.

  • NaN:NaN
    해설 대본 보기

    강화 원도심 스토리워크는 강화읍의 숨겨진 역사와 문화를 직접 걸으며 느낄 수 있는 도보 여행 코스입니다. 강화의 역사, 산업, 종교를 한눈에 만날 수 있으며 강화 역사만이 아닌 대한민국 근대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의미 있는 곳이지요. 총 10군데의 강화군 여행 명소로 이루어진 강화 원도심 스토리워크는 도보로 2시간 정도 걸리는 2.6km 정도의 코스입니다. 심도직물터에서 출발하여,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3.1 독립만세 기념비, 노동사목 표지석, 700년 은행나무, 이화견직 담장길, 조양방직, 강화 중앙교회, 합일 초등학교 독립운동길, 소창체험관까지 이어지지요. 한국 방직 산업을 이끌었던 직물 공장들과 독립운동가들의 치열한 독립활동을 담은 빛바랜 건물들이 세월의 흔적을 충분히 느끼게 합니다. 첫 번째 장소부터 마지막 장소까지 어느 한 곳 빼놓지 않고 강화의 옛이야기를 담고 있어 흥미를 돋우지요. 그럼 강화군 여행 시 꼭 방문해 보아야 할 강화 원도심 스토리워크, 첫 번째 코스부터 하나씩 살펴볼까요?

  • NaN:NaN
    해설 대본 보기

    주위 풍경과 어울리지 않은 오래된 굴뚝이 있는 이 곳은 강화 원도심 스토리워크의 출발지 심도직물터입니다. 현재는 용흥궁 공원이지만 과거에는 강화의 직물산업을 주도했던 심도직물이 있던 곳입니다. 공장이 무너지면서 앞에 보이는 굴뚝만 남아 있게 된 것이지요. 굴뚝 옆에는 당시 공장에서 사용하던 직조기도 보존되어 있으며 그 주변으로는 솜의 재료 목화도 심어져 있습니다. 1970년대 말까지 강화는 대구, 수원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직물 생산지로 명성을 누렸습니다. 직물산업 덕분에 강화는 전국에서 잘 사는 지역 중 하나로 꼽혔으며, 국가 경제에도 크게 기여했지요. 그리고 강화가 직물 산업으로 이름을 알리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회사가 바로 심도직물입니다. 심도직물은 1947년 김재소 씨에 의해 세워졌으며, 당시 강화에 있었던 직물 공장 중 가장 번창하였습니다. 1970년대에는 역직기 210대와 1200여 명의 직원이 있을 정도였지요. 회사 이름에 들어있는 심도는 강화도의 별칭입니다. 이러한 심도직물의 번성을 바탕으로 김재소씨는 1967년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정치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당시 심도직물은 노동착취가 극심했던 기업이기도 했습니다. 한때 번창했던 심도직물은 화학 섬유의 등장과 함께 인조 직물이 등장하고 대구가 섬유산업의 중심지가 되면서, 강화의 직물산업 쇠퇴와 함께 스러져갔습니다. 비록 지금은 옛날의 그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남아 있는 굴뚝과 방직기가 과거 영화로웠던 강화의 모습을 상상하게 합니다.

  • NaN:NaN
    해설 대본 보기

    오늘날 우리는 주위에서 많은 성당을 마주할 수 있는데요. 혹시 한옥으로 된 성당을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인천 강화에서는 옛 느낌이 넉넉하게 느껴지는 한옥 성당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현존하는 성당 중 가장 오래된 한옥 성당인 대한 성공회 강화성당입니다. 강화 성당은 심도직물 굴뚝에서 고개를 조금 돌리면 보이는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1900년에 한옥으로 지어진 대한성공회 성당은 대한성공회의 초대 주교인 고요한에 의해 건립되었습니다. 대한성공회의 역사는 1889년 고요한이 초대 한국 주교로 영국에서 서품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는데요.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한 사람의 신자도 없었다고 합니다. 이후 신자가 하나 둘 생기게 되었으며, 1898년 6월 강화도에서는 고요한이 한국인에게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었죠. 대한성공회에서는 이러한 인연으로 강화에 제일 먼저 성당을 건립한 것입니다. 성당 건축은 경복궁의 중건 공사에 참여했던 궁궐 도편수가 주도했고, 목재는 압록강에서 운반해 와 사용했습니다. 현재까지도 처음 형태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모습이지요. 강화 성당은 서양과 동양의 양식을 과감하게 조합시켜 건립하였다는 점에서 특별하게 여겨집니다. 내부는 바실리카 양식을 따랐고, 외부는 한식 기와지붕으로 되어 있는 불교 사찰의 형태를 하고 있지요. 강화성당은 전체적으로 배 모양을 본 떠 뱃머리인 서쪽에는 외삼문 및 내삼문을 배치하고 중앙에는 성당을 두었습니다. 또 뒤쪽에는 신부가 머무는 사제관을 배치하여 우리나라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유적입니다. 강화성당은 일제 침략의 상처가 담겨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1910년 한국을 강제로 병합한 일제는 교회 정문 계단 난간과 종을 뜯어 갔기 때문이지요. 이후 복원 사업을 통해 복원되었답니다. 초기 성공회 선교사들의 토착화 의지가 나타나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 기독교 역사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강화성당에서는 아직도 매주 일요일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 NaN:NaN
    해설 대본 보기

    1919년 3월 18일, 강화읍 장터에서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날 만세시위에 감리교계 기독교 인사들을 비롯하여 무려 10,000여 명의 강화도 주민들이 참여하였습니다. 이 만세시위는 3.1 운동 중 지방 단위로서는 전국 최대 시위로 꼽히지요. 강화 진위대의 군인 출신으로 평소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고 있던 유봉진 등 주도자들은 3월 1일 이래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파악했습니다. 이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여 강화도의 만세운동을 계획하였죠. 이들은 3월 11일 황유부의 집에 모여 만세운동의 거사 일을 강화읍 장터의 장날인 3월 18일로 결정했습니다. 3월 18일 강화읍의 위 장터, 아래 장터로 많은 주민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오후 2시경 결사대원들이 먼저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시위를 선도하였습니다. 이에 주민들이 일제히 호응하여 큰 목소리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했습니다. 대규모 만세시위가 발생하자, 일제 경찰은 만세시위의 해산을 명령하며 만세시위대의 선두에 있던 결사대원들을 체포하였습니다. 이에 격앙된 만세시위대는 유봉진의 지휘에 따라 곧바로 일제 경찰서로 쫓아가서 구속자의 석방을 요구했지요. 동시에 일제 경찰 및 군청의 직원들도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강하게 압박했습니다. 무려 10,000여 명의 대규모 만세시위대의 위력에 군수 이봉종은 순순히 나와 만세시위대와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고, 일제 경찰도 결국 만세시위 초기에 체포한 결사대원들을 석방할 수밖에 없었지요. 결국 강화도의 일제 경찰만으로는 만세시위를 막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일제는 외부에서 경찰과 군대를 투입하여 만세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습니다. 이후 일제는 유봉진을 비롯한 만세시위 주도자들을 체포, 투옥시켰으며,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에 대해 태형 등의 고통을 주었습니다. 1994년 이와 같은 강화 독립만세 운동을 기념하고자 견자산 기슭에 기념비를 세웠는데요. 기념비는 1996년 만세시위의 발상지인 웃장터로 옮겨졌다가 2011년 8월 용흥궁 공원 내로 이전되었습니다.

  • NaN:NaN
    해설 대본 보기

    심도 직물 생산품이 국내외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강화의 경제는 날이 갈수록 발전했습니다. 심도직물은 당시 100만 달러 이상을 수출하여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직물공장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어두운 면도 생겨났습니다. 한정된 노동력으로 수많은 직물을 생산해야 했던 직물 회사들은 어린 소녀들과 노동자들에게 과도한 노동을 요구한 것이지요. 하루 12시간 일하는 것은 물론이고 휴일 전날 야간조는 거의 24시간에 가까운 노동을 해야 했다고 합니다. 이에 강화도 직물 회사 중 하나인 심도 직물에 노조가 결성되었고, 천주교 강화성당을 중심으로 노동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가톨릭 노동 청년회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직물회사와 투쟁을 시작하였지요. 1968년 1월 초 심도직물은 노조 분회장 및 조합원 등 16명의 노동자들을 해고했습니다. 당시 해고자들 모두가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그리고 1월 8일, 강화도 내 21개 직물회사들의 대표들이 모여 앞으로 가톨릭 노동 청년회원을 고용하지 않겠다는 등의 내용이 담긴 7개 항의 결의문을 작성하고 이를 중앙일간지에 발표했습니다. 가톨릭노동청년회의 총재는 불과 1년 반 전에 마산 교구의 주교가 된 김수환이었지요. 그는 즉시 조사단을 구성해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이후 그는 주교단 회의를 주도해‘사회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주교단 성명서’를 발표합니다. 이것은 사회문제에 대한 천주교 주교단의 첫 성명서였습니다. 이에 심도직물의 집단 해고가 한국현대사 최초로 정치 문제로 비화되었습니다. 천주교 측에서도 이 사건을 천주교 박해 행위로 규정하며 공개사과를 지속적으로 요구했습니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강화직물협의회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2월이 되어 1월에 발표한 결의문을 철폐하고,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노동자들을 복직시켰습니다. 회사 측과의 치열한 분쟁을 통해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일부 회복하는 성과를 이룬 이 사건은 오늘날 한국의 노동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답니다. 또한, 한국 천주교가 노동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첫 사건으로 가톨릭 노동 운동사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기리기 위해 건립된 노동사목 표지석을 천주교 인천 교구 강화 성당 안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 NaN:NaN
    해설 대본 보기

    고려궁지에서 강화산성 북문으로 올라가다 보면 눈에 확 띄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있습니다. 1982년 강화군에서 보호수로 지정할 당시 688년 수령이었으니 지금은 무려 700년이 훌쩍 넘었지요. 이 은행나무는 1300년 경 고려시대 때 처음 심어진 것을 알 수 있는데요, 이때는 고려가 몽고와의 전쟁 후 차츰 쇠락의 길을 걷던 시기였습니다. 때문에 고려, 조선, 한국 근대사 그리고 오늘날의 모습까지 오롯이 지켜보며 우리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기만 해도 든든한 이 나무는 봄에는 고개를 빼꼼 내민 새순이 주변 꽃과 어우러져 있으며, 여름에는 무성한 잎으로 강화 주민들에게 시원한 그늘이 되어 줍니다. 또한, 가을이면 노랗게 물든 잎이 장관을 이루고 겨울에는 아무것도 달리지 않은 가지지만 세월을 나타내는 굵직한 줄기가 자태를 뽐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계절 내내 아름답고도 멋진 은행나무가 어쩐지 존경스러워지는 마음이 듭니다. 은행나무는 지금도 강화읍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우리의 새로운 역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출처: 한국관광공사 오디오가이드 오디

위치

이 근처 이렇게 둘러보세요

본 정보는 한국관광공사 TourAPI · 공공누리 제1유형(출처표시)를 활용합니다. · 최종 확인일 2026-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