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강화솥밥집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강화솥밥집

강화솥밥집은 깔끔한 음식맛으로 단골손님이 꾸준히 찾는 맛집이다. 대표 메뉴로는 솥밥정식, 약쑥솥밥정식이 있고 갈치조림, 고등어조림, 젓국갈비 등을 판매하고 있다. 기본 반찬도 깔끔하고 맛나며 국과 함께 리필이 가능하다. 솥밥정식은 밥을 퍼내고 물을 부어두면 식사 후 입가심으로 숭늉을 즐길 수 있다. 약쑥솥밥은 밥이 갈색빛이 돌며 은은한 쑥향이 그윽해 향만 맡아도 건강해지는 느낌이다. 식당 내부는 화이트와 우드로 깔끔하고 편안한 느낌이며 테이블 수도 넉넉한 편이다.

이용 정보

대표메뉴솥밥정식
취급메뉴솥밥정식 / 약쑥솥밥정식 / 갈치조림 / 젓국갈비 / 묵은지고등어조림 외
영업시간09:00 - 20:30라스트오더 19:30
휴무일매주 월요일
주차불가
문의032-932-2232

오디오 해설

현장에서 들을 수 있는 해설 음원입니다. 대본도 함께 확인하세요.

  • NaN:NaN
    해설 대본 보기

    심도직물 터 예로부터 한반도 중심부였던 강화도는 한국사의 축소판이라고 할 만큼 유구하고 굵직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선사시대에는 막강한 지배층을 형성했던 청동기인들이 살았고, 시조인 단군은 마니산 참성단에 제사를 지내며 하늘의 뜻을 이어받았죠. 고려는 몽골의 침입에 맞서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기고 궁궐을 짓기도 했습니다. 몽골과의 화친 조건으로 허물어 지금은 볼 수 없지만요. 조선시대에는 전쟁이 일어나면 왕이 이곳으로 피신을 하였고, 근대에 들어서도 강대국들이 호시탐탐 넘보는 게 강화도였습니다. 프랑스의 병인양요, 미국의 신미양요, 일본의 운요호 사건 등이 대표적입니다. 강화도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대구, 수원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직물 도시였습니다. 조양방직, 평화직물, 심도직물, 이화직물 등 직물공장만 30여 곳이 있었고, 직물공장 직원도 4,000여명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친 석유파동과 정부의 정책에 따라 합성섬유를 생산하는 대구로 방직산업의 중심이 옮겨 가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현재는 목화솜으로 만든 천연 직물인 소창을 생산하는 작은 공장만이 몇 곳 남아 있습니다. 강화군은 직물산업의 역사를 기리기 위해 심도직물의 공장 굴뚝 윗부분을 잘라 공원 옆에 세워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주변에 목화나무를 심었는데요. 8월이면 목화꽃을 볼 수 있습니다. 탐스럽게 피어나는 하얀 목화꽃은 이곳이 강화도의 직물산업을 주도하며 국가 경제발전에 기여했던 곳이란 걸 알리기라도 하듯 아름답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 NaN:NaN
    해설 대본 보기

    이화견직 담장길 강화도 특산물 하면 인삼, 밴댕이, 순무 등이 떠오르지만, 예전에는 화문석을 최고로 쳤습니다. 여름철에 왕골돗자리는 필수품이었습니다. 열을 차단하고 땀을 흡수해주기 때문이었죠. 특히 강화도에서 생산된 왕골은 희고 윤기가 났으며 잘 부스러지지 않습니다. 때문에 고려 중엽부터 가내 수공업으로 무늬가 없는 백자리를 만들었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왕실로부터 꽃처럼 예쁜 문양을 넣은 화문석을 제작하라는 명을 받고 화문석을 개발했습니다. 고드랫돌을 이용해 수작업으로 한올 한올 엮는 화문석은 손끝 맵기로 유명한 강화도 여성들의 섬세한 기술과 정성으로 탄생한 명품이었지요. 근대에 들어서면서 강화도는 방직산업의 메카로 떠올랐습니다. 화문석을 짜던 여인들이 솜씨가 직물 제조로 옮겨간 것이지요. 강화도에는 일본 강점기부터 거의 모든 가정에 '족답기'라는 수동식 베틀이 있었습니다. 여성들이 인조견을 짜는 용도였는데, 말리기 위해 들판에 걸어 놓은 하얀 천이 마치 섬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물결처럼 보였다고 하네요. 강화도 부녀자들은 인조견을 팔기 위해 바닷길을 건너 전국으로 행상길에 나섰습니다. 이렇게 억척스러운 강화 여인들을 두고 '넉살 좋은 강화년'이라는 말이 생길 걸 보면 그 길이 비단길, 꽃길만은 아니었나 봅니다. 수공업 형태의 직물산업은 강화도 실업가인 홍재묵·홍재용 형제가 1993년 조양방직 주식회사를 세우며 근대적 기틀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이후 심도직물·남화직물·이화직물·평화직물 등의 업체들이 차례로 들어서면서 1970년 대까지 전성기를 누립니다. 그 중 남궁형이 설립한 이화직물은 근로자만 300여 명에 달하는 꽤 큰 회사였습니다. 현재 건물은 대부분 철거되었지만 담장은 보존이 잘 되어 그 시대를 살았던 강화도 사람들의 아픔과 추억을 간직한 길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이화견직 담장길에는 강화도의 직물산업 역사, 심도직물 노동 조합사건, 이화직물·심도직물·조영방직·남화직물·평화직물 소개, 1970년 대 심도직물 거리 전경 등이 이야기와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고, 직조기와 공장전경이 부조형식으로 제작되어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강화도는 방직공작 때문에 육지의 웬만한 도시보다 전기와 전화가 먼저 들어왔습니다. 전깃불을 보기 위해 바다 건너 육지에서도 구경을 왔을 정도였으니까요. 이 시기 강화도는 전국의 부자 고장으로 이름을 날렸고, 인구는 지금의 두 배 이상이었습니다. 이화견직 담장길의 스토리보드에서 번성했던 그 시절의 옛 이야기를 읽어보세요.

  • NaN:NaN
    해설 대본 보기

    노동사목 표지석 197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강화읍 거리는 하루 두 번 직물공장 교대시간에 맞춰 공장으로 출·퇴근하는 앳된 얼굴의 여공들로 넘쳐났습니다. 가난한 집안의 여성들은 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시집가기 전까지 직물공장에서 일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강화읍내 재부분의 사람들은 직물공장에서 일하며 먹고 살았어요. 여러 직물공장 중에서도 심도직물은 그 규모가 상당히 커서 매일 1,200여 명의 노당자가 하루 12시간씩 맞교대를 해야 했던 곳입니다. 그 덕분에 심도직물의 '웸블리넥타이'는 '심도직물'의 대표적인 수출상품으로 미국을 위시한 선진국 여러 나라로 수출되었고 수출역군으로 칭송 받기도 했지요. 그러나 그 성과 뒤에는 노동자들의 고된 땀방울이 가득했습니다. 노동력이 부족해진 회사는 노동자들에게 과도한 노동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하루 12시간도 강행군인데 휴일 전날 야간조는 24시간에 가까운 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어린 소녀 노동자들은 밤샘 작업에 시달리며 코피를 쏟는 일이 잡았고, 공장의 먼지 때문에 끊임없이 기침을 해댔습니다. 이런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고자 1967년 5월 300여명의 직원이 참여한 노조가 결성되었는데, 전미카엘 신부를 주축으로 한 가톨릭 도통청년회(JOC)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노조는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직물회사와 토쟁을 시작하자 회사는 지속적인 노조 와해 작업을 펴고 조합원을 탄압하는 등 갈등이 이어졌습니다. 결국 주교단이 1968년 2월 9일 '사회정의와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한다'는 제목의 공동 성명을 내놓으며 노동자를 지지하자 심도직물이 속한 강화직물업자협회는 노조와 조합원 탄압을 철회하고 해고 노동자 복직을 약속했습니다. 심도직물 노동조합 사건은 천주교 강화성당에 노동사목 표지석으로 남아 기억되고 있습니다. 심도직물 노동조합 사건은 한국 천주교가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고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한 첫 사건으로 가톨릭 노동운동사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천주교 인천교구에서는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천주교 강화성당에 노동사목 표지석을 세웠습니다. 장시간 노동과 값싼 노동력이 필요했던 방직산업과 강인한 생활력을 자랑하는, 손재주가 남달랐던 강화 여성들은 서로 필요충분조건이었습니다. 그렇게 필연적으로 직물 생산의 노동자가 되어 강화의 경제를 일으켰던 강화도 여성들의 억척스럽고 열악한 삶은 1970~80년대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사에 큰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 NaN:NaN
    해설 대본 보기

    김상용 순절비 강화도의 아픈 과거 중 가장 큰 것이 병자호란일 것입니다. 강화도는 몽골도 건드리지 못했던 천해 요새였습니다. 그런데 청나라의 3천 병력에 수많은 백성이 죽거나 포로로 끌려간 전행이 병자호란입니다. 오랑캐 만주족이 세운 나라인 청나라는 한족 정권인 명나라를 중원에서 밀어내고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러나 중화의 정통성이 명나라에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조선은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야만시하다가 결국 병자호란을 겪게 되었지요. 1636년 12월 9일, 꽁꽁 언 길이 된 압록강을 건넌 청군은 파죽지세로 밀려왔고, 일주일도 되지 않아 한양이 함락되었습니다. 강화도로 피난 가려던 인조는 청군에 의해 길목이 봉쇄되어 소현세자와 신하들만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갔죠. 먼저 출발한 인조의 후궁과 왕자들은 강화도에 들어가 있었는데, 이들을 호위하며 함께 간 사람이 바로 김상용이었습니다. 김상용은 도승지·대사헌·형조판서·우의정을 역임한 원로 대신으로, 뛰어난 외교술로 명나라를 상대하는 어려운 일을 맡아 처리하였습니다. 그는 강화도에 있는 동안 남한산성의 소식을 계속 수집하여 의병을 꾸려 남한산성에 지원을 갈 것을 도모하였지만 결국 청군이 강화성을 사방으로 포위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심, 성의 남문루에 올라 폭약 더미 위에 불을 붙인 뒤 그 위에 올라가 자결하였습니다. 이 일로 그의 동생이자 척화 대신으로 알려진 김상헌과 더불어 조선후기절의의 상징이 되었지요. 용흥궁공원에는 김상용의 충의를 추모하고 기리는 김상용의 순절비가 있습니다. 비각 안에는 두 개의 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하나는 김상용의 증손인 김창협이 글을 짓고 김창집이 글씨를 써서 1700년에 세원 것이고, 다른 하나는 원래의 비문이 마모되어 1817년에 다시 세운 것입니다. 고려시대부터 근대까지 저항과 긍지의 숨결이 된 강화도. 치열했던 역사가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고스란히 빛나고 있습니다.

  • NaN:NaN
    해설 대본 보기

    강화문학관 고려시대 대 문호인 이규보.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정수 정철,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인 정인보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바로 강화도와 인연이 많은 문인이자 학자들이라는 것 입니다. 이규보는 강화에 머물러 수많은 글들을 남겼고, 송강 정철은 주옥같은 가사문학을 남긴 후 강화도송정촌에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조선 중기의 정제두를 필두로 이광사, 이충익, 이시원과 근세의 이건창, 현대의 정인보 등으로 이어지는 '강화학파' 문인들의 문학과 사상은 강화의 전통 문학을 더욱 풍성하게 하였습니다. 강화 출신의 수필가 고 조경희 선생의 유지에 의하여 건립한 강화문학관은 이런 민족 문학의 위대한 정신을 계승하고, 강화문학의 자존심과 굳은 절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긴 역사만큼이나 많은 문인과 풍부한 작품을 남긴 강화문학의 세계가 다양한 전시물을 통해 펼쳐지는데요, 1층 전시실에는 한국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이규보와 정철, 정제두 등 강화도와 관련이 있는 옛 문인들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2층에는 월당 조경희 선생의 문학 세계와 생애를 전해주는 수필문학관과 기증유품 9,000여점이 전시되어 있어 선생의 숭고한 뜻을 되새겨 볼 수 있습니다. 조경희 선생은 1914년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에서 출생하여 한국수필가협회장, 한국문화예술 총연합회장, 제2정무장관을 역임한 강화도의 대표적인 문인입니다. 전시 관람을 마치면 목판인쇄 체험코너에서 목판인쇄를 직접 해 볼 수도 있습니다. 강화의 유서깊은 역사문화와 민족문화의 전통을 전시하고 있는 강화문학관은 자라나는 후세에게 문학의 꿈과 희망을 키워주고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의 소중한 쉼터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출처: 한국관광공사 오디오가이드 오디

위치

이 근처 이렇게 둘러보세요

본 정보는 한국관광공사 TourAPI · 공공누리 제1·3유형를 활용합니다. · 최종 확인일 2026-10-17